양순주의 하나의 사건과 여러 겹의 시선(웹진 문화다)에 대한 응답

 

김 만 석(<로컬데모>)

 

1.

20151231일 뜬금없이 <로컬데모>를 언급한 한편의 글이 도착하였다. 양순주의 하나의 사건과 여러 겹의 시선(웹진 문화다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letters_vilage&ps_boid=24)은 지역의 두 문예지의 여러 사정들을 언급하고 있었고 그 첫머리에 신생사태에 대한 이견을 담고 있던 터라 관심을 기울여 거듭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 글은 비평문의 꼴을 취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공유되지 않은 정보들을 근거로 논지를 펼치고 있는 터라 논점을 종잡을 수 없고 사안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기보단 맹렬한 비난에 가까운 어휘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울러 같은 지역의 구성원이라는 발화 위치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으나 동료라는 수평적인 자리에서 의견을 전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소간 과잉된 방식으로 <로컬데모>의 저의나 욕망, 정치적인 불순함을 확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로컬데모>의 활동을 단순화하고 왜곡하고 있는 글이기에 이에 응답하려 한다.

  양순주의 글을 조목조목 따져 읽기보단 핵심적인 주장을 간략하게 정리해 답하는 게 필요할 듯해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보았다. 1)지역잡지 신생에서 해임된 두 사람이 <로컬데모>를 통해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해임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해임자체만을 드러내는 것은 일방적이고 편파적이다. 2)잡지 발간을 하다보면, 헤아릴 수 없는 여러 사정과 갈등이 발생한다. 이를 내부에서 수용하고 동료애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일도 있고 없는 일도 있다. 지역잡지 오늘의 문예비평도 그런 경험을 했다. 현재 출판사를 옮기게 된 사정으로 힘들지만 함께 이겨내려 한다. 오늘의 문예비평은 앞으로 더 날카로워지려고 한다. 3)발랄하고 현란한 수사로 무장한 후배들이 애초의 문제 의식을 흐리게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는 자들의 동의의 언사가 제 2의 피해자를 낳고 있으니 자숙할 필요가 있다. 이 외에 <로컬데모>와는 관계없이 제시되는 문맥들이 있어 짐작과 추론이 아니라, 다시 질문을 드려야만 하는 상황이기도 함을 미리 밝혀둔다.

 

2.

우선 오늘의 문예비평이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더욱 열심히 정진해주면, 지역의 비평문화가 활성화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의 문예비평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양순주의 글도 침체된 비평문화를 활성화 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양순주는 자신이 발화하고 있는 말의 근거를 마련하지 않은 채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주장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어서 비평문화 활성화에 값했는지는 회의적이다. 양순주는 오늘의 문예비평의 내부 사정을 근거로 짐작하거나 추론하여 신생 두 편집위원에게 행사된 권리박탈의 이면의 진실이라는 게 있을 수 있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고 있다. ‘신생 사태5년 이상 편집위원직을 맡고 있던 두 사람(김대성/김만석)을 제외한 자리에서 해임 건을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이에 대한 해명 요구에 그 어떤 응답도 하지 않고 묵살로 일관하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지칭한다. 양순주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이면의 진실해임 건에 관한 건지, ‘묵살에 관한 건지, 대체 그게 무엇인지 그 진실을 직접 알려주었으면 한다. 그런 게 있다고만 쓰고 있고, 글의 어디에도 그 구체적인 내용을 찾을 수가 없어, 답답한 마음에 관심법이라도 실시해야 하는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이 원고가 짐작과 추론에 의지한 채 과격한 방식으로 작성되어 있어 꼼꼼하게 읽는 것이 다소 민망한 노릇이지만, “<로컬데모>”로부터 출발하여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이것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자와 같은 알 수 없는 수사를 동원해 모든 사람들을 싸잡아 이어 붙여 동일화하려는 논리를 반성 없이 활용하는 필자의 논리적 비약을 감내하며 묻고자 한다. <로컬데모>가 부산문단을 페이스북을 통해서 논란으로 만든 적이 있는가? 양순주는 <로컬데모>가 주최하는 모임에 한 번도 참석한 일 없이 어떻게 그 모임에 참석한 구성원들의 면면에 대해 공통의 문제의식’(‘신생 사태에 대한 문제제기)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을 동일한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양순주 본인의 표현처럼 인식론적인 폭력에 해당되는 일이지 않은가? 더 알 수 없고 문제적인 대목은 <로컬데모> 입장에 대해 지지 하지 않는 이들을 가해와 피해, 권력과 폭력이라는 이분화된 잣대를 들어가며” “비판하고 심판하고 있다고 하는데, <로컬데모>가 어떤 비판과 심판을 했는지 알려주기 바란다. 필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사안에 대한 겹의 시선을 강조하려면, 적어도 자신이 일관된 태도로 공격하고 있는 <로컬데모>의 활동 또한 여러 겹의 시선으로 읽어보려는 시도라도 해야 하는 일 아닌가? 자신이 속해 있는 매체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묘사하며 분투하고 있음을 구구절절 알리고 있으면서 타인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째서 저토록 과감하게 단순화하고 근거없는 비난과 심판으로 일관하고 있는지 그 저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양순주의 글이 자신이 속해 있는 매체의 고군분투를 홍보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로컬데모>라는 모임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기 위한 것인지 글의 내용만으론 파악하기가 어렵다 

뿐만 아니라 페이스북에 누군가가 관련한 글을 남기면 모두가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로컬데모>에서도 여러 차례의 메일링과 게시판에 관련 글에 대한 업로드를 통해서야 신생 사태의 내용을 겨우 전달할 수 있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모니터링을 하고 있지만 그 비평가의 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무응답의 고리를 깨트리고 최초로 발언한 이에게 되돌아온 것은 동지를 만났다는 기쁨이 아닌, 그간의 침묵에 대한 다그침과 질책<로컬데모>가 했을 리 만무하다. 우리는 어떤 사태를 알리기 위해 몇 개월간 갖은 경로를 통해 응답을 기다려왔다. 6개월 기간 정도를 지나왔음에도, 여전히 응답을 기다렸고 뜬금없이 이상한 방식으로 도착한 양순주의 글에도 이렇게 응답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로컬데모>가 하지 않은 일을 한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는 뻔한 조언을 하기 보단, <로컬데모>가 다그친 적도 질책한 적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로컬데모>가 그런 행위를 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방식으로 진술해야만 하는 황당한 저의가 궁금할 따름이다. 우리는 신생 사태를 사적인 불행이 아니라 공적인 문제로 전회할 필요가 있음을 요청한 일은 있지만 그에 응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누군가를 규정하려 하거나 낙인찍은 일은 없다. 

<로컬데모>는 그간 연속간담회데모북등을 통해서 후기를 남기고 전달된 말을 잘 받아서 다시 돌려주기 위해 애를 써왔다. 데모북과 연속 간담회를 통해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와 출판노동자 그리고 시간강사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참여하지 않거나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이를 으로 상정하고 매도한 바가 없다. 사실과 무관한 이런 대목들을 제외하고 담백하게 양순주의 원고를 읽으면 오늘의 문예비평에 관한 홍보이자 소식이어서, 그에 관해서 우리가 따로 드릴 수 있는 이야기가 별로 없다. 힘내서 열심히 하시기 바란다. ‘해봤으니 다 안다는 어법이 유행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여전히, 왜 본인이 소속된 잡지 사정과 <로컬데모>를 겹쳐서 쓴 것인지 납득되지 않는다  

 

3.

<로컬데모> 활동을 지지하고 있는 이들을 싸잡아 매도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조언을 하려는 대목이 있어 이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아래 인용문은 문학자의 신념/결단/윤리를 들이밀면서 이루어지는 조언으로 사실 <로컬데모>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가 답한들 물음을 던진 이를 만족시켜줄 순 없겠지만 연대 서명을 해준 분들과 현장에 나와 응원과 지지의 말을 전해준 동료들에 대한 도의적 책임감으로 짧게나마 답하고자 한다. 연대 서명의 자리를 잘 알지도 못하는 자, 그들의 말을 감정적 울분의 표출, 혹은 막말을 일삼으면서 되갚음 하는 폭언으로 매도하고 있는 양순주의 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로컬데모에 동의를 표하면서 끊임없이 문제 해명을 촉구하는 사람들에게도 묻고 싶다. 일상적인 주변의 문제들을 얼마만큼 예민하게 감각하고 반응하고 응답을 주었는지 말이다. 그들이 날카롭게 들이미는 칼날이 실상 자신을 향한 적은 있는지 되물어 보고 싶다. 적어도 공부를 하면서 사유하고 말하고 글쓰는 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을 동반해야 한다. 다른 이들을 파괴시키는 비판의 화살이 나에게만 너그럽고 관대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에게도 그 활을 팽팽히 당겨 날카로운 화살을 겨냥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문학자의 신념이자 결단, 아직까지는 저버릴 수 없는 윤리라고 생각한다.

(중략)

더불어 잘 알지도 못하는 자들의 동의의 언사들은 역으로 제2, 3의 피해자를 낳고 있다. 감정적으로 울분을 표출하면서 혹은 막말을 일삼으면서 되갚음 하는 글들은 폭언에 다름 아니다. 로컬데모의 서명에 적힌 몇몇 한마디들을 보면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두가 당사자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면 책임감 있는 발언이나 행동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때만 진실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생 사태또한 그럴 것이다. ‘신생 사태가 두 편집위원을 배제한 자리에서 공모를 통해 해임을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권리 박탈의 사안이 아닌 풍문으로 떠돌고 있는 이면의 진실에 의해 다르게 기록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어떤 집단이든 내부적인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신생 사태는 뒤늦게 그것을 폭로하고 고발하기 위해 명명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와 같은 사실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공개적인 방식으로 기록하고 알린 바가 있다. 다시 그 내용을 설명하기보다 누구라도 읽을 수 있도록 열려 있는 블로그에 들어와 최소한의 정보라도 확인하고 말을 건네주었으면 한다. 현실이 시궁창이라고 현장까지 버릴 수는 없다. 내몰린 자리에서 가까스로 현장을 지키고자 <로컬데모>라는 협의 구성체를 만들어 일구고 있다. 6개월 간 <신생>의 편집진들에게, <부산작가회의>의 사무국과 회원들에게 수차례 이 사태를 알리고 해결 방안을 촉구하는 요청을 보냈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이 묵살의 구조가 단지 두 당사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곳의 모든 이들이 당면해 있는 문제라는 인식으로 <로컬데모>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로컬데모>신생 사태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많은 문화예술인들과의 교류 속에서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들을 현장에서 기록하고 또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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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겨울, 시간강사 / 김만석  (0) 2015.12.25

원문 : [인문학 칼럼] 겨울, 시간강사 /김만석(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151224.22031192814)

겨울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드러나는 계절이다. 잡풀에 가려졌던 나무의 뼈대가 드러나고 이파리에 가려진 혈관들도 속수무책으로 나타난다.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보이기도 하고 놓치거나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들이 달력을 바꿀 때 문득 나타나 괴롭히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겨울은 세계를 민낯으로 보이게 만드는 힘을 가진 계절이기도 하다. 아무리 두꺼운 옷으로 몸을 칭칭 감고 있어도 몸 안쪽에서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통풍이 예민하게 바깥 기온들을 알아차리듯, 겨울이 되면 녹음과 과실의 성과에 취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차갑게 식은 사물들은 생경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촉감을 날카롭게 만들기도 한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나 자신들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겨울은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스승'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작 겨울이 되면 '스승'의 자격이 박탈되는 사람들이 있다. 시간강사들이 그러하다. 시간강사는 대학 내 구성원이지만, 대학 내에서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겨울이 와도 이들은 더 잘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시간강사들에게 겨울은 헐벗는 시간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완전히 헐벗어 가시권에서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학생들과 교학상장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며 매 수업 때마다 무언가를 일구려고 하지만, 그것이 겨울 너머 '미래'를 열어주지 않으니 시간강사들에겐 봄도 없다.  

만약 시간강사의 현재가 망각되거나 지워야 할 시간이라면, 수행하는 수업은 모두 지워져야 할 수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강사들은 빈자리로 대학 내에 위치해 있는 셈이다. 시간강사의 역사나 경험들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적 담화 속에서만 고개를 겨우 내밀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비정규 시간강사 노조가 대학 내에서 자신들을 알려왔지만, 대학 안팎에서 모두 이들의 활동을 보고 있음에도 모른 척해왔고 그들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묵살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른바 시간강사법이 내년 1월 1일부로 발효되기 바로 직전에서야 '유예'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물론 시간강사들이 단지 무기력하게 법적, 정책적 결정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발간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은 시간강사가 대학 내에 유령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연구노동자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위치시켜준 저작이다. 굳이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위치를 가늠해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야 곤경들로 가득 찬 이야기로만 읽히겠지만, 매번 애써 자리를 모색하고 활동의 지속을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시간강사의 일상을 치열하게 길어 올린 민속지적 보고서이자 연구서와 다르지 않은 책이다. 이뿐만 아니라, 비정규 시간강사 노조는 2007년 이후부터 지금껏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해 오지 않았던가. 

더불어 지난 18일 부산 중구 중앙동 또따또가 갤러리에서 진행된 '로컬데모'의 서평회와 연속간담회에서는 시간강사들이 부산에서 처음으로 대학 바깥에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논의한 바 있다. 시간강사 문제가 다만 당사자들이 겪는 곤경이며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내팽개쳐야 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공적 지식의 생산에서부터 학생들의 수업권 그리고 대학원생들의 연구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평에서 공유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자리였다. 비정규 시간강사 노조 활동을 하고 있는 분과 시간강사 노동으로 15년을 활동하신 분에서부터 강의를 더는 맡지 못하게 된 예술가 그리고 대학원생,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어우러져 열정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대체로 시간강사들이 고립돼 있기 마련인데, 이 자리에서 그 곁에 함께 선 많은 동료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대학 구조조정의 여파로 모두 각자도생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에서 고립을 피하고 곁에 선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할 수 있었다. 예컨대, 모두발언을 했던 한 대학원생은 연구공동체가 와해돼 가는 대학사회에서, 대학생들이 주체로 움직이는 지역적 연대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인문예술사회계 전공이 대학 사회에서 위축되거나 통폐합, 폐과되는 상황에서 연구의 지속과 이를 공적 지식으로 환원하기 위한 방식일 뿐만 아니라 연구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조건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는 또 지역 관계 세대 젠더 등도 함께 논의되었는데, 이는 시간강사의 곁이 다종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시간강사라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던, 침묵(당)했던 주변들이 함께 만나 말을 드디어 주고받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소소하고 조용한 연대가 이 겨울을 버티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쯤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았을 테니까 말이다. 주변은 어디에나 있다. 손을 내밀어 곁이 되자. 


<<국제신문>> 2015.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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