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순주의 하나의 사건과 여러 겹의 시선(웹진 문화다)에 대한 응답

 

김 만 석(<로컬데모>)

 

1.

20151231일 뜬금없이 <로컬데모>를 언급한 한편의 글이 도착하였다. 양순주의 하나의 사건과 여러 겹의 시선(웹진 문화다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letters_vilage&ps_boid=24)은 지역의 두 문예지의 여러 사정들을 언급하고 있었고 그 첫머리에 신생사태에 대한 이견을 담고 있던 터라 관심을 기울여 거듭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 글은 비평문의 꼴을 취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공유되지 않은 정보들을 근거로 논지를 펼치고 있는 터라 논점을 종잡을 수 없고 사안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기보단 맹렬한 비난에 가까운 어휘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울러 같은 지역의 구성원이라는 발화 위치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으나 동료라는 수평적인 자리에서 의견을 전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소간 과잉된 방식으로 <로컬데모>의 저의나 욕망, 정치적인 불순함을 확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로컬데모>의 활동을 단순화하고 왜곡하고 있는 글이기에 이에 응답하려 한다.

  양순주의 글을 조목조목 따져 읽기보단 핵심적인 주장을 간략하게 정리해 답하는 게 필요할 듯해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보았다. 1)지역잡지 신생에서 해임된 두 사람이 <로컬데모>를 통해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해임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해임자체만을 드러내는 것은 일방적이고 편파적이다. 2)잡지 발간을 하다보면, 헤아릴 수 없는 여러 사정과 갈등이 발생한다. 이를 내부에서 수용하고 동료애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일도 있고 없는 일도 있다. 지역잡지 오늘의 문예비평도 그런 경험을 했다. 현재 출판사를 옮기게 된 사정으로 힘들지만 함께 이겨내려 한다. 오늘의 문예비평은 앞으로 더 날카로워지려고 한다. 3)발랄하고 현란한 수사로 무장한 후배들이 애초의 문제 의식을 흐리게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는 자들의 동의의 언사가 제 2의 피해자를 낳고 있으니 자숙할 필요가 있다. 이 외에 <로컬데모>와는 관계없이 제시되는 문맥들이 있어 짐작과 추론이 아니라, 다시 질문을 드려야만 하는 상황이기도 함을 미리 밝혀둔다.

 

2.

우선 오늘의 문예비평이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더욱 열심히 정진해주면, 지역의 비평문화가 활성화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의 문예비평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양순주의 글도 침체된 비평문화를 활성화 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양순주는 자신이 발화하고 있는 말의 근거를 마련하지 않은 채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주장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어서 비평문화 활성화에 값했는지는 회의적이다. 양순주는 오늘의 문예비평의 내부 사정을 근거로 짐작하거나 추론하여 신생 두 편집위원에게 행사된 권리박탈의 이면의 진실이라는 게 있을 수 있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고 있다. ‘신생 사태5년 이상 편집위원직을 맡고 있던 두 사람(김대성/김만석)을 제외한 자리에서 해임 건을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이에 대한 해명 요구에 그 어떤 응답도 하지 않고 묵살로 일관하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지칭한다. 양순주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이면의 진실해임 건에 관한 건지, ‘묵살에 관한 건지, 대체 그게 무엇인지 그 진실을 직접 알려주었으면 한다. 그런 게 있다고만 쓰고 있고, 글의 어디에도 그 구체적인 내용을 찾을 수가 없어, 답답한 마음에 관심법이라도 실시해야 하는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이 원고가 짐작과 추론에 의지한 채 과격한 방식으로 작성되어 있어 꼼꼼하게 읽는 것이 다소 민망한 노릇이지만, “<로컬데모>”로부터 출발하여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이것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자와 같은 알 수 없는 수사를 동원해 모든 사람들을 싸잡아 이어 붙여 동일화하려는 논리를 반성 없이 활용하는 필자의 논리적 비약을 감내하며 묻고자 한다. <로컬데모>가 부산문단을 페이스북을 통해서 논란으로 만든 적이 있는가? 양순주는 <로컬데모>가 주최하는 모임에 한 번도 참석한 일 없이 어떻게 그 모임에 참석한 구성원들의 면면에 대해 공통의 문제의식’(‘신생 사태에 대한 문제제기)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을 동일한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양순주 본인의 표현처럼 인식론적인 폭력에 해당되는 일이지 않은가? 더 알 수 없고 문제적인 대목은 <로컬데모> 입장에 대해 지지 하지 않는 이들을 가해와 피해, 권력과 폭력이라는 이분화된 잣대를 들어가며” “비판하고 심판하고 있다고 하는데, <로컬데모>가 어떤 비판과 심판을 했는지 알려주기 바란다. 필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사안에 대한 겹의 시선을 강조하려면, 적어도 자신이 일관된 태도로 공격하고 있는 <로컬데모>의 활동 또한 여러 겹의 시선으로 읽어보려는 시도라도 해야 하는 일 아닌가? 자신이 속해 있는 매체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묘사하며 분투하고 있음을 구구절절 알리고 있으면서 타인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째서 저토록 과감하게 단순화하고 근거없는 비난과 심판으로 일관하고 있는지 그 저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양순주의 글이 자신이 속해 있는 매체의 고군분투를 홍보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로컬데모>라는 모임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기 위한 것인지 글의 내용만으론 파악하기가 어렵다 

뿐만 아니라 페이스북에 누군가가 관련한 글을 남기면 모두가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로컬데모>에서도 여러 차례의 메일링과 게시판에 관련 글에 대한 업로드를 통해서야 신생 사태의 내용을 겨우 전달할 수 있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모니터링을 하고 있지만 그 비평가의 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무응답의 고리를 깨트리고 최초로 발언한 이에게 되돌아온 것은 동지를 만났다는 기쁨이 아닌, 그간의 침묵에 대한 다그침과 질책<로컬데모>가 했을 리 만무하다. 우리는 어떤 사태를 알리기 위해 몇 개월간 갖은 경로를 통해 응답을 기다려왔다. 6개월 기간 정도를 지나왔음에도, 여전히 응답을 기다렸고 뜬금없이 이상한 방식으로 도착한 양순주의 글에도 이렇게 응답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로컬데모>가 하지 않은 일을 한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는 뻔한 조언을 하기 보단, <로컬데모>가 다그친 적도 질책한 적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로컬데모>가 그런 행위를 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방식으로 진술해야만 하는 황당한 저의가 궁금할 따름이다. 우리는 신생 사태를 사적인 불행이 아니라 공적인 문제로 전회할 필요가 있음을 요청한 일은 있지만 그에 응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누군가를 규정하려 하거나 낙인찍은 일은 없다. 

<로컬데모>는 그간 연속간담회데모북등을 통해서 후기를 남기고 전달된 말을 잘 받아서 다시 돌려주기 위해 애를 써왔다. 데모북과 연속 간담회를 통해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와 출판노동자 그리고 시간강사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참여하지 않거나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이를 으로 상정하고 매도한 바가 없다. 사실과 무관한 이런 대목들을 제외하고 담백하게 양순주의 원고를 읽으면 오늘의 문예비평에 관한 홍보이자 소식이어서, 그에 관해서 우리가 따로 드릴 수 있는 이야기가 별로 없다. 힘내서 열심히 하시기 바란다. ‘해봤으니 다 안다는 어법이 유행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여전히, 왜 본인이 소속된 잡지 사정과 <로컬데모>를 겹쳐서 쓴 것인지 납득되지 않는다  

 

3.

<로컬데모> 활동을 지지하고 있는 이들을 싸잡아 매도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조언을 하려는 대목이 있어 이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아래 인용문은 문학자의 신념/결단/윤리를 들이밀면서 이루어지는 조언으로 사실 <로컬데모>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가 답한들 물음을 던진 이를 만족시켜줄 순 없겠지만 연대 서명을 해준 분들과 현장에 나와 응원과 지지의 말을 전해준 동료들에 대한 도의적 책임감으로 짧게나마 답하고자 한다. 연대 서명의 자리를 잘 알지도 못하는 자, 그들의 말을 감정적 울분의 표출, 혹은 막말을 일삼으면서 되갚음 하는 폭언으로 매도하고 있는 양순주의 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로컬데모에 동의를 표하면서 끊임없이 문제 해명을 촉구하는 사람들에게도 묻고 싶다. 일상적인 주변의 문제들을 얼마만큼 예민하게 감각하고 반응하고 응답을 주었는지 말이다. 그들이 날카롭게 들이미는 칼날이 실상 자신을 향한 적은 있는지 되물어 보고 싶다. 적어도 공부를 하면서 사유하고 말하고 글쓰는 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을 동반해야 한다. 다른 이들을 파괴시키는 비판의 화살이 나에게만 너그럽고 관대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에게도 그 활을 팽팽히 당겨 날카로운 화살을 겨냥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문학자의 신념이자 결단, 아직까지는 저버릴 수 없는 윤리라고 생각한다.

(중략)

더불어 잘 알지도 못하는 자들의 동의의 언사들은 역으로 제2, 3의 피해자를 낳고 있다. 감정적으로 울분을 표출하면서 혹은 막말을 일삼으면서 되갚음 하는 글들은 폭언에 다름 아니다. 로컬데모의 서명에 적힌 몇몇 한마디들을 보면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두가 당사자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면 책임감 있는 발언이나 행동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때만 진실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생 사태또한 그럴 것이다. ‘신생 사태가 두 편집위원을 배제한 자리에서 공모를 통해 해임을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권리 박탈의 사안이 아닌 풍문으로 떠돌고 있는 이면의 진실에 의해 다르게 기록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어떤 집단이든 내부적인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신생 사태는 뒤늦게 그것을 폭로하고 고발하기 위해 명명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와 같은 사실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공개적인 방식으로 기록하고 알린 바가 있다. 다시 그 내용을 설명하기보다 누구라도 읽을 수 있도록 열려 있는 블로그에 들어와 최소한의 정보라도 확인하고 말을 건네주었으면 한다. 현실이 시궁창이라고 현장까지 버릴 수는 없다. 내몰린 자리에서 가까스로 현장을 지키고자 <로컬데모>라는 협의 구성체를 만들어 일구고 있다. 6개월 간 <신생>의 편집진들에게, <부산작가회의>의 사무국과 회원들에게 수차례 이 사태를 알리고 해결 방안을 촉구하는 요청을 보냈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이 묵살의 구조가 단지 두 당사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곳의 모든 이들이 당면해 있는 문제라는 인식으로 <로컬데모>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로컬데모>신생 사태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많은 문화예술인들과의 교류 속에서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들을 현장에서 기록하고 또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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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겨울, 시간강사 / 김만석  (0) 2015.12.25

안녕하세요. <로컬데모>입니다.

새해 첫 인사를 작년 12월 18일 많은 분들과 함께 열고 진행했던 <시간강사라는 주변 : 곁과 편>(데모북+연속간담회)에 대한 보고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시급한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중하고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서 아낌없이 귀한 이력 속에서 길러낸 말을 정성스럽게 내어주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강의록(업로드 완료)과 후기 등으로 정리해 블로그에 올려두도록 하겠습니다. 당일 현장에서 느낀 점이나 <로컬데모>에게 전하실 말씀이 있으면 로컬데모 메일 계정(loculdemo@gmail.com)으로 보내주시면 경청한 뒤 응답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부 <데모:북>을 이끌어주신 양창아 선생님과 대담을 진행했던 김대성 선생님, 2부 <연속간담회>를 이끌어주신 김명주 선생님, 황지희 선생님, 이형진 선생님, 그리고 사전 모임에서부터 현장 진행까지 애써주신 김만석 선생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컬데모> 활동 기금 마련에 기꺼이 작품을 기증해주신 김경화 작가님, 윤필남 작가님, 이인미 작가님, 서평주 작가님, 은주 작가님, 하민지 작가님, 감사드립니다. 현장에 직접 오셔서 응원해주시고 더 해서 바자회 물품까지 아낌없이 구매해주셔서 무척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새)책을 기증해주신 김만석 님, 김대성 님, 최은순 님, 양경숙 님, 좋은 책을 내어주셔서 80% 이상이 판매 되었습니다. 직접 원두를 볶아오셔서 완판(!) 해주신 최은순 님께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당일 현장 촬영을 해주신 송진희 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굿즈 판매+책 판매+원두 판매로 총 530,000원의 수익금이 발생했습니다. 당일 애써주신 데모북+연속간담회 토론자분들께 소정의 토론비를 지급하는 데 사용했으며 2016년 행사를 진행하는 데 알뜰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참석해 현장의 온기를 더해주신 양현보 님, 양재일 님, 차지연 님, 이수경 님 장수희 님, 박조은 님, 김현정 님, 정선욱 님, 신현아 님, 박상현 님, 마혜련 님, 김희연 님, 허주영 님, 신소연 님, 권도유 님, 이현정 님, 최성경 님, 조윤경 님, 박정민 님, 김효영 님, 권종민 님, 김경화 님, 윤필남 님, 은주 님, 하민지 님, 서평주 님, 감사드립니다. 이후에도 방명록에 남겨주신 메일 주소로 <로컬데모> 소식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들에게도 궂은 소식이든 좋은 소식이든 알려주시면 나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참석 하시진 못했지만 도서를 구입해주신 오여준 님과 원두를 구입해주신 이정님 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방명록에 성함을 남기지 않으신 분들과 미처 성함을 챙기지 못한 분들이 여럿일 줄로 압니다. 늦게라도 메일로 성함을 알려주시면 향후 행사 때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은행나무, 2015)의 저자이신 김민섭 선생님께서 지지와 연대의 메시지를 전해주셨고 감사하게도 해당 저서 5권을 우편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 책이 필요한 분들에게 대신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5년에 여름 즈음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모였던 <로컬데모>가 짧은 시간동안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각자의 현장에서 쌓아올린 이력 속에서 품고 있던 물음과 문제들을 주고받았던 일들이 홀로 헤쳐왔다고 생각했던 각자의 시간이 서로 교류할 수 있도록 작은 교량이 만드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만남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깨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2016년에도 <데모:북>과 <연속간담회>를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더 열심히 기록하도록 하겠습니다. 더 많은 접속과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다시 현장에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내내 강녕하시기 바랍니다.

 

2016. 1. 3

지역문화예술인들의 권리 수호를 위한 협의 구성체

<로컬데모> 드림

 

 

 

원문 : [인문학 칼럼] 겨울, 시간강사 /김만석(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151224.22031192814)

겨울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드러나는 계절이다. 잡풀에 가려졌던 나무의 뼈대가 드러나고 이파리에 가려진 혈관들도 속수무책으로 나타난다.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보이기도 하고 놓치거나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들이 달력을 바꿀 때 문득 나타나 괴롭히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겨울은 세계를 민낯으로 보이게 만드는 힘을 가진 계절이기도 하다. 아무리 두꺼운 옷으로 몸을 칭칭 감고 있어도 몸 안쪽에서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통풍이 예민하게 바깥 기온들을 알아차리듯, 겨울이 되면 녹음과 과실의 성과에 취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차갑게 식은 사물들은 생경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촉감을 날카롭게 만들기도 한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나 자신들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겨울은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스승'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작 겨울이 되면 '스승'의 자격이 박탈되는 사람들이 있다. 시간강사들이 그러하다. 시간강사는 대학 내 구성원이지만, 대학 내에서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겨울이 와도 이들은 더 잘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시간강사들에게 겨울은 헐벗는 시간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완전히 헐벗어 가시권에서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학생들과 교학상장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며 매 수업 때마다 무언가를 일구려고 하지만, 그것이 겨울 너머 '미래'를 열어주지 않으니 시간강사들에겐 봄도 없다.  

만약 시간강사의 현재가 망각되거나 지워야 할 시간이라면, 수행하는 수업은 모두 지워져야 할 수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강사들은 빈자리로 대학 내에 위치해 있는 셈이다. 시간강사의 역사나 경험들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적 담화 속에서만 고개를 겨우 내밀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비정규 시간강사 노조가 대학 내에서 자신들을 알려왔지만, 대학 안팎에서 모두 이들의 활동을 보고 있음에도 모른 척해왔고 그들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묵살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른바 시간강사법이 내년 1월 1일부로 발효되기 바로 직전에서야 '유예'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물론 시간강사들이 단지 무기력하게 법적, 정책적 결정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발간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은 시간강사가 대학 내에 유령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연구노동자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위치시켜준 저작이다. 굳이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위치를 가늠해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야 곤경들로 가득 찬 이야기로만 읽히겠지만, 매번 애써 자리를 모색하고 활동의 지속을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시간강사의 일상을 치열하게 길어 올린 민속지적 보고서이자 연구서와 다르지 않은 책이다. 이뿐만 아니라, 비정규 시간강사 노조는 2007년 이후부터 지금껏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해 오지 않았던가. 

더불어 지난 18일 부산 중구 중앙동 또따또가 갤러리에서 진행된 '로컬데모'의 서평회와 연속간담회에서는 시간강사들이 부산에서 처음으로 대학 바깥에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논의한 바 있다. 시간강사 문제가 다만 당사자들이 겪는 곤경이며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내팽개쳐야 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공적 지식의 생산에서부터 학생들의 수업권 그리고 대학원생들의 연구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평에서 공유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자리였다. 비정규 시간강사 노조 활동을 하고 있는 분과 시간강사 노동으로 15년을 활동하신 분에서부터 강의를 더는 맡지 못하게 된 예술가 그리고 대학원생,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어우러져 열정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대체로 시간강사들이 고립돼 있기 마련인데, 이 자리에서 그 곁에 함께 선 많은 동료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대학 구조조정의 여파로 모두 각자도생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에서 고립을 피하고 곁에 선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할 수 있었다. 예컨대, 모두발언을 했던 한 대학원생은 연구공동체가 와해돼 가는 대학사회에서, 대학생들이 주체로 움직이는 지역적 연대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인문예술사회계 전공이 대학 사회에서 위축되거나 통폐합, 폐과되는 상황에서 연구의 지속과 이를 공적 지식으로 환원하기 위한 방식일 뿐만 아니라 연구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조건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는 또 지역 관계 세대 젠더 등도 함께 논의되었는데, 이는 시간강사의 곁이 다종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시간강사라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던, 침묵(당)했던 주변들이 함께 만나 말을 드디어 주고받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소소하고 조용한 연대가 이 겨울을 버티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쯤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았을 테니까 말이다. 주변은 어디에나 있다. 손을 내밀어 곁이 되자. 


<<국제신문>> 2015. 12. 24







  

 

양창아(부산대 비정규 교수)


1.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루하루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좀처럼 표현되지 않고, 표현되어도 전달되지 않고, 전달되어도 응답되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든 타인의 이야기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우리는 아직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 모든 싸움들이 더 오래 지속되고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유, 전부는 아니더라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싸우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뇌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기껏해야 ‘그들’이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느낄 뿐 그 속내를 이해할 방법은 없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고립이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확인하는 체험이며 그런 체험이 반복될 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오래 싸운 사람들이 고집불통으로 보이고 실제로 그런 면모를 지니게 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고립된 한 사람이 기댈 곳이 자기가 옳다고 여겨온 신념밖에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더욱더 고립될 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거기에 지지 않겠다는 의지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욕망이 남아있을 때, 사람들은 펜을 들고 곁에 없으나 어딘가에는 있을 동료를 향해 말을 건넨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309동 1201호 지음, 은행나무, 2015)를 그렇게 건네진 말들로 읽는다.   

2. 이 말들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학이라는 곳이 익숙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데, 그 일차적인 이유는 아마도 대학을 일터라고 여기지 않거나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여기는 데에, 그리고 특히나 연구하고 강의하는 사람들을 노동자로 보지 않는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대학원에서 생활하고 시간강사 일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책에서 그려진 상황에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다니는 곳보다 낫다’거나, ‘나는 운이 좋았던 건가 이런 상황은 말도 안 된다’라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 이 기록을 읽은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대학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그의 삶의 기록에서 보이는 고통스러움과 소소한 기쁨들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것과 그의 것을 비교하고 대조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들을 감지하면서도 눈 돌리기 힘든 이 말들의 힘은 역시나 자기가 겪은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에서 나오는 것. 그 기록 속에서 ‘연구하는 자’로서의 정체성과 ‘노동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이 분열되고 겹쳐지고 경합하는 ‘시간강사’의 독특한 경험의 자리를 확인한다. 그리고 대학이 이미 기업이 되어버린 상황 속에서도 시간강사의 삶을 결정하는 ‘노동’의 자리, 대학에서의 노동의 조건에 대해 꺼내어 놓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 시간강사들의 욕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그의 말에 답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그와 유사하거나 다른 경험들을 나열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그의 경험이 잘 보여주는 대학에서의 노동의 자리를 살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의 기록에 응답하는, 그가 바랐듯이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과 대학원에 적용될” 것인 이야기를 공론화하는 더 좋은 방식일 것이다.

그의 기록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맥도널드의 노동조건과 대학의 노동조건을 비교한 부분은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대학 밖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많은 공감을 얻었는데, 이 부분은 단순히 대학보다 맥도널드에서 일하는 게 더 낫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서로 다른 두 일터에서의 노동 경험을 기록하면서 시간강사의 노동 현장이 어떠한지를 드러냄으로써, 그 기록을 읽어가는 우리는 평소에 보고 싶어 하지 않던 대학의 착취 구조란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접근해 들어가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는 그의 요구, 쓰라린 그 고독의 시간이 담겨 있는 글 곳곳에, 이곳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 같이 보고 이야기를 좀 해보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그가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자신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대학을 보고 기록한 부분, 그곳에서의 일그러진 일상들을 기록한 부분이야말로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더욱 필요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3.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몇몇 부분을 발췌하여 이곳에 옮긴다. 

“2008년 봄, 석사 1기 시절, 나는 학과 사무실의 대학원생 막내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의무적으로 학과 사무실이나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그런데 학부생 조교들 역시 공강 시간을 제외하고는 사무실에 몸이 매여 있었다. 학부생 조교들은 평균 15~20학점을 들으며 일주일에 20시간 이상 근무했다. 그러면 한 학기가 16주인데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에는 근무가 없어 대략 13주, 도합 260시간 넘게 일하고 80만원을 받아 가게 된다. 지금도 이러한 시스템이니 최저 시급에는 한참 못 미치는 액수다. 나는 조교 실장에게 조심스레 학부생 조교들이 일하는 시간을 모두 합해보면 최저 시급도 못 받는 것 같네요, 했다. 그는 알아, 그런데 우리는 뭐 받고 일하냐,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당연히 또 그렇게 하는 거지, 하고 답했다. 그의 말을 요약해보면 대학원생도 같은 처지이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그러니까 당연하다, 라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구조의 밑바닥에 있는 ‘개인’이었고, 조직의 관행과 싸울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서 그저 아 그렇네요, 하고 마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쩔 수 없지, 하는 조교실장 역시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우리 학과는 형편이 나았다. 계절학기까지 알뜰하게 출근시키는 학과도 적지 않다고 해서, 나는 욕이 튀어나왔다.”(111쪽) 

 

“대학원 과정을 모두 수료하고 시간강사가 된 지금도,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기에도 빠듯하다. 생업인 강의와 연구가 생계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까닭이다. 강의실에서는 허울 좋은 교수님이지만, 4대 보험조차 보장되지 않는 4개월짜리 비정규직 노동자다.”(12쪽) 

 

“‘대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다. 대학원생에서 시간강사로 이어지는 착취의 구조는 이미 공고한 시스템으로 자리잡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을 가속화해온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다. 그런데 대학은 스스로에게 숭고함과 신성함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동시에 그 어느 집단보다도 기민하게 자본의 논리에 영합해왔다. 흔히 대학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하고 미루어 짐작하지만 대학은 그 어느 기업보다도 노동권의 치외법권 지대에 있다. 학부생과 대학원생 조교가 받는 거의 모든 보수는 학비 감면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조교 장학금은 등록금 인상 폭에 관계없이 10년 째 그대로다. 교직원과 함께 일하거나 교직원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지만, 최저 시급, 주휴 수당, 초과 수당, 4대 보험 등 노동자로서 받아야 할 기본적인 안전망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대학은 학생의 노동력으로 행정 공백을 채우고, 그들이 내야 할 수업료를 일부 감면해주는 방식으로 인건비 지출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동네 편의점도 노동부의 눈치를 보며 최저시급과 주휴 수당을 챙겨주는 형편임을 감안하면, 어떤 면에서 대학은 거리의 편의점만도 못하다.”(13쪽) 

 

“아마도 내가, 혹은 내 또래의 대학원생이나 시간강사들이 겪는 외로움의 근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반(半)사회적인 인간이다. 학생도 아니고 사회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듯한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반(反)사회적 인간이다. 다른 노동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 표면적으로 노동하고, 사회가 원하는 소득과 소비 기준, 그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한다. 일주일에 네 시간 노동(강의)하고 월급을 받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비난한다. 강의 준비, 과제 첨삭, 개인 면담과 같이 드러나지 않는 노동의 시간이 오히려 더 길지만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사회성의 결여, 사회에서 함께 동시하고 있으나 동시하지 않다고 느끼는 동시성의 비동시성, 이러한 외로움은 연애나 우정이나 가족애 같은 것으로는 극복되지 않는다. ‘사회적’이지 못한 존재는, 외롭다.”(66쪽) 

 

“누군가는 내게 ‘교수’가 되기 위해 ‘지방시’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 아닌가 묻는다. 그러니 본인이 그러한 삶을 선택했다고도 말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운 좋게 교수가 되면 모든 삶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잠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나의 하루하루를 갉아먹었고, 나의 현재를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격하해버렸다. 간신히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오로지 교수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강의실에서든 연구실에서든 노동자로 존재하기 위해 모두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236-237쪽) 

 

“지방시 이전과 이후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이 사회의 무수한 지방시 중 하나일 뿐이다.”(237쪽)

 

4. 페이스북에 이 책의 저자가 쓴 특별기고 <나는 시간강사다: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둡니다>(http://slownews.kr/49121)를 공유해놓았더니 한 선생님께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남기셨다. “시간강사를 그만두는 데도 인터뷰를 하는 경우가 다 있구나, 허. 우리들 대다수는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는데 시간강사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들었다. 불쌍한 사람은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나는 그 글을 읽고 한편으로 공감하면서도 “그러나 그가 과연 그만둔 것일까? 그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가 결정한 이 일이 쫓겨난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겪게 될 일”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주고받은 말에서, 다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곳의 대학에서 연구하고 강의하는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두려움과 우리가 직면한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살아남은 자와 쫓겨난 자. 쫓겨난 자와 떠나간 자. 대학구조‘개혁’이 진행 중인 지금 이곳의 대학에서 많은 시간강사들은 한편으로는 남아 있고 싶다는 욕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나가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하루하루 흔들린다. 그리고 좀처럼 방향을 틀 것 같지 않은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 속에서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대학’이란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느 순간 ‘대학’이란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가가 ‘능력’으로 여겨진다는 사실도 말해야 한다. 언젠가 ‘여기 아니면 내가 갈 데가 없는 줄 아나?’ 또는 ‘나는 뭐 여기서 일자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와 같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묘한 박탈감을 느꼈다. 그 말을 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그때는 가늠하지 못했다.

“이곳을 떠나고 싶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어서” 이 두 문장은 “‘난민’이 된 한국 청년”(강정석, <시사인> 429호)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기사에서 한 인터뷰이는 “내 일에서 보람을 느끼면서도 먹고살아갈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남자든 여자든 앞으로의 삶 정도는 계획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살면서 행복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느 하나도 충족되지 않는 나라에 왜 남아 있느냐를, 저는 오히려 묻고 싶어요.”라고 말하는데, 이 세 가지 요청이 그 자체로 어색하고 너무도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뿐일까? “‘대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다.”(지방시, 13쪽) 이 괴물에게서 빠져 나가면 또 다른가? 대학보다 더 넓고, 더 큰 똑같은 구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가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라고 사람들은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문제는 대학 안이냐 밖이냐가 아니다. 안에서 밖을 만들고, 그와 동시에 밖에서 안을 문제 삼음으로써 개입해 들어오는 과정이 필요하다. 대학이 괴물이라는 사실에 공감하면서도 안에서 싸우는 것이 답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답이다 라는 식으로 선을 긋고 서로 적대하기보다는, 안이든 밖이든 지금의 대학의 구조와 그곳에서의 삶의 방식을 문제 삼는 많은 말들을 만들어내는 일이 시급하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당연히 또 그렇게 하는”(지방시, 111쪽) 것을 그만두고 싶다는 것을 말하기. 그리고 그러한 종류의 ‘정치적인’ 말하기를 이어가면서 대학의 문제가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논의하기. 그런데 대학의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때 ‘탈조선’이 말해지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문제없는 곳이 어디 있는가”라는 의문과 무력감을 드러내는 반응들, “학교라는 곳, 이미 망가진 지 오래다. 새삼스레 우리가 왜 그곳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거기보다 급박한 문제에 직면한 곳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라는 질책들을 마주하는데, 그 반응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5.  지금 이곳에서 ‘학문’을, ‘예술’을 한다는 것,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곧 하게 될 몇 마디가 사람들에게 가장 이해받기 힘든 것임을 예감한다. 책을 읽는 중에는 “그래, 대학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시간강사들이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거나 잊고 싶어 하지”하며 공감하고 지난 시간들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면, 책을 덮으면서는 “아 또 한 사람의 연구자를 잃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이 책은 한 시간강사가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시간강사로 일하게 된 ‘나의’ 경험을 쓰고 있고, 그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의’ 연구와 생활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실상 연구란 개인의 것에 그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개인의 것이 아니다. ‘공공의 것’으로서의 ‘지식’이라는 생각을 놓치기 쉽다는 것도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다. 생각해보면, 역설적으로 ‘권력’으로서의 ‘지식’이라는 생각은 익숙한데, ‘개인’이 아니라 ‘인류’의 지식이라는 생각은 낯설다. ‘가난’도 여러 가지다. 나는 우리 사회가 한 명의 연구자를 잃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어떤 부분이 더 곤궁해진 것이라고 본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연구자가 맡고 있는 책임이라는 것은 공적인 앎, 인류의 앎에 기여하는 데 있는데, 이런 말은 현재의 대학 또는 사회의 상황을 보면 공허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6. 마이클 애플의 책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강희룡 외 옮김, 살림터, 2014)에 대한 장정일의 독서일기 <자유경제원이 왜 앞장섰을까>는 “국정화 논란에서 교육 자체를 고민해봐야 한다. 교육이 중립적이라는 것은 환상이다. 경제위기 때 정부와 보수 언론이 벌이는 교육 논쟁은 실업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고 기업이 원하는 ‘교육 설비의 재편’을 꾀하는 시도다.”라는 부제(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676)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던 대학도 이러한 시도 가운데 있으며, 소위 ‘대학구조개혁법’과 그것의 가장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타격을 받을 시간강사들의 노동조건을 변화시킬 ‘강사법’의 시행도 이러한 시도의 맥락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살펴야 한다. (이에 대한 다양하고 상세한 논의들은 <문화/과학> 82호 ‘신자유주의 대학’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http://cultural.jinbo.net/?p=1456 참고.) 

“신자유주의가 부상한 지난 30~40년 동안 교육이 정치적 정체성의 변화에서 주변부적인 것이 아니라 핵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회변혁의 장소로 그리고 사회변혁의 도구로 학교를 성공적으로 이용”한 것은 보수 우파였다. […] 거대한 사회·교육적 프로그램을 통해 보수 우파는 자유에 대한 대중의 상식을 차츰 바꾸어왔다. 즉 자유란 정치적인 개념이 아니라 규제받지 않는 시장 기능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납득시킴으로써 “‘사적’ 자본의 축적이야말로 공공선”이라는 것을 오늘의 사회 상식으로 만들어놓았다.” 

“교육이 신자유주의의 정리(定理)를 수용함으로써 학교는 학생들에게 개인은 성공할 수 있지만 모두는 성공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을 예습하는 훈련장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학교는 새로운 세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는 제도가 된다.”  

나는 지방시에서 반복되는 한 문장 “대학은 역행해야 한다”를, 지금 이 순간에도 행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무수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의 재편’의 흐름 속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다시 읽는다. 그리고 서경식의 『시의 힘』(서은혜 옮김, 현암사, 2015)에서 읽은 “지배층의 이야기(Master narrative)에 피지배자 측의 대항적인 이야기(Counter narrative)를 대치하는 것이 미래 인류의 ‘새로운 보편성’을 구축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한”(52쪽)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 사회의 무수한 지방시 중 하나일 뿐”(지방시, 237쪽) 그와 나의 자리, ‘고난’을 겪고 있는 무수한 ‘나’들의 자리에서 행해질 말들로 엮이게 될 ‘대항 이야기’가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로컬데모>에서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이야기들은 발화되고 대답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러한 대항 이야기들이 ‘새로운 보편성’을 가지고 고립된 채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으려면, 각각의 이야기들이 자신의 고난을 바로 바라봄으로써 타자의 고난도 상상할 수 있는 태도와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 그러한 말들을 주고받는 가운데 “‘자신의 고난’을 철저하게 응시하는 것이 ‘타자의 고난’을 향한 상상으로 열릴 수 있는가”(『시의 힘』, 216쪽)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2015. 12. 18_중앙동 또따또가 갤러리 <시간강사라는 주변 : 곁과 편>(데모북+연속간담회)

 

 

 

 

 

시간강사라는 주변 : 곁과 편 데모:북 + 로컬데모 연속간담회

로컬데모의 이번 연속 간담회와 데모:북은 ‘비정규 시간강사’ 문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텍스트와 함께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대담과 토론을 연속해서 진행합니다. 부산지역에서 활동하는 철학, 예술, 인문학 분야의 비정규 시간강사 분들이 대담자와 토론자로서 함께 참여해주실 예정입니다. 물론 또한 현장에서는 지역예술인들의 작은 작품들을 구매하실 수 있는 작은 마켓과 로컬데모의 헌책 판매도 진행됩니다.

 

로컬데모?

 

 

<로컬데모>는 지역의 문화, 예술적 장에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협의 구성체’입니다.

제도적 문화, 예술이 일구어 나가는 텃밭은 물론이거니와 그곳에 소속되지 않았더라도 더불어 활동을 하고자 하거나 사람들 사이를 잇고 연결하려는 노력들에 접속하여 그 ‘현장’을 기록하고 나누고자 합니다.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다종다양한 활동들이 수면 아래에서 긴 잠항을 거듭하기만 하거나 지역을 바라보는 프레임 바깥에 놓이게 될 때, 지역이 항상 ‘불모’로 이미지화되거나 ‘사막’으로 여겨지는 방식이 되었음을 상기하면, 작고 소소한 실천들을 해나가는 사람이나 공동체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나누는 일은 지역의 문화, 예술적 장을 풍부하게 일구는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지역의 문화, 예술적 장의 생태를 드러난 형상으로만 보려는 게 아니라, 지각되지 않았던 자리를 만드는 모험과 실천들을 통해 지역의 문화, 예술적 지도를 다시 그리거나 수정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범주와 분류표에 들어오지 않은 활동과 접속하는 일은 범주와 분류표를 새로 만들도록 요구하고 요청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으니, 그러한 활동들은 지역의 문화, 예술적 장에 활력을 부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쇄신이나 갱신, 자정 능력을 고양하는 데까지 힘을 미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로컬데모>의 지도가 새롭게 작성되고 기록될 때, 지역의 문화, 예술의 활동이나 실천들이 다시 쓰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는 아닐 것입니다. 하여 <로컬데모>는 ‘함께’ ‘희망’의 ‘별 밭’을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http://loculdemo.tistory.com
www.facebook.com/loculdemo

 

이야기를 시작하며

강사법 폐기냐, 유예냐라는 다급한 논의 아래에서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간강사들(인문학, 예술학)과 대학원생들과 함께 시간강사 문제를 시작으로, 파편화되고 분절되는 대학 사회 현장의 목소리를 한 자리에 모아보고자 합니다. 정책 제안보다는 각자의 자리에서 발화할 수 있는 이야기를 경청하고 또 응답하는 것을 통해 '곁'이라는 연대의 장소를 보살피고자 합니다.

 

프로그램

17:00 - 18:00
체크인 / 데모북+간담회 진행 및 운영비 마련을 위한 헌책 판매와 지역 작가들의 굿즈 판매


1부 (제3회 데모:북)


18:00 - 19:00
 대담
양창아 (부산대 비정규 교수), 김대성 (로컬데모)

19:00 - 20:00
플로어 토론


2부 (제2회 로컬데모 연속간담회)


20:20 - 21:20
 모두 발언과 테이블 토론
김만석 (로컬데모), 김명주 (부산대 철학과 비정규 교수), 황지희 (작가, 예술 강사), 이형진 (동아대 국문과 박사과정)

21:30 - 22:30

플로어 토론

 

제3회 <데모:북> —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309동 1201호, 은행나무, 2015)

<데모:북>은 부산대학교의 비정규교수노조 부산대 분회에서 활동을 해오고 있는 ‘양창아 선생님’을 모시고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은행나무, 2015)라는 문제적 저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는 합니다. 이 책을 통해 대학 내부에 소속되어 있지만 은폐되어 잘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겨지는 시간강사와 그 삶을 둘러싼 다채로운 경험들이 갖는 의미와 곤경들을 짚어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만 시간강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시간강사의 ‘생애사적 주기’가 붕괴되고 있다는 것은 대학 내 다른 구성원들의 삶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시간강사와 그 곁의 삶이 모여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제2회 <연속 간담회> — 비정규시간강사라는 주변과 그 주변들

<로컬데모>는 그간 시간강사들이 경험하는 대학 내에서의 강의 활동이나 연구 활동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시간강사들이 겪는 곤경이 ‘죽음’의 문턱을 건널 때에야 겨우 사회적인 형식을 얻어왔다면, 이를 사적인 위기 속에서 다루어야 할 게 아니라 공적인 담론을 통해서 나누고 전해져야 할 사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각 대학별로 그리고 전공에 따라 처지는 다종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런 차이를 바탕으로 시간강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 적은 별로 없습니다. 이번 <연속 간담회>는 서로 다른 경험치를 가진 인문학 시간강사와 예술학 시간강사 그리고 대학원생이 자신이 터해 있는 자리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교차하고 만나게 하고자 합니다. 그 과정에서 시간강사를 둘러싼 ‘주변’에게 자리를 허용하도록 해보고 적어도 말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됩니다. 쉽게 할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고 더듬거리거나 좌충우돌하겠지만, ‘함께’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015년 12월 18일(금) 오후 6시, 
중앙동 또따또가 갤러리에서 뵙겠습니다.

 문의

loculdemo@gmail.com
010 - 8502 - 9467
010 - 9610 - 1624

 

 

 

 

 

ⓒYKS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가 먼저 돕는다

『출판, 노동, 목소리』(고아영 외 10인, 숨쉬는책공장, 2015)

김 대 성(<로컬데모>)

 

1. 허락 받지 않은 자리

언제나 그렇듯 책을 펼쳐 활자를 읽기 전에 날렵하고 매끄러운 책의 표면을 어루만져본다.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매만지는 감촉을 좋아했던 것은 책 그 자체를 내부 깊숙하게 감추어져 있는 비밀스러운 활자의 육체라고 여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그 탐닉이 더 강해졌다고 할 수 있으니 크게 틀린 짐작은 아닐 듯하다. 무표정하고 딱딱하면서도 한없이 관능적인 이 이중성이야말로 ‘책’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그 매력에 대한 탐닉이 책에 대한 페티쉬(fetishism)를 강화하고 때론 책을 신성화하기도 한다. 『출판, 노동, 목소리』(고아영 외 10인, 숨쉬는책공장, 2015) 또한 습관처럼 매만지다가 책에 대한 탐닉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를 억누르는 데 동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핏 디자인이 최소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밋밋한 책의 표지를 쓰다듬기만 했는데도 말이다.

이 책은 펼치기 전부터 이미 이야기를 시작 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책을 탐닉해온 오래된 습관 중의 하나인 표지를 어루만지는 행위를 향해 있었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의 표지엔 내부에 있어야 할 것이 바깥으로 나와 있고 굳이 기입하지 않아도 될 정보가 주인의 이름처럼 새겨져 있다. 대개는 책의 맨 뒷장에 정보 차원으로 기입되어 있는 발행인과 펴낸이, 펴낸곳, 동록번호 ISBN 등이 표지 ‘디자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요즘엔 웬만한 책엔 ‘삭제’되어 있는 디자인, 영업, 편집자의 이름뿐만 아니라 종이와 인쇄․재본에 관한 정보까지 표지 디자인에 동참하고 있다. 책의 맨 뒷자리에 있어야 할 이름이 책의 맨 앞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 조금은 어색한 그 자리바꿈이 책을 탐닉하던 내 손을 멈칫거리게 했다. 멈칫거림의 이유. 그건 책에 대한 관념과 태도만이 아니라 ‘책’이라는 간명한 이름 속에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기입되어 있는지, 아니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책’이라는 이름을 들어올리고 있었는지를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음을 인지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감춰야 하는 것이 드러나 있을 때 쉽게 공격 받는다. 그런데 ‘권리’ 또한 그렇게 허락 받지 않은 자리에 나왔을 때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말해왔던 ‘권리’가 실은 누군가에게 허락 받거나 승인 받은 뒤에만 이야기 되어 온 것은 아닐까. 허락 받지 않은 자리에서 권리를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인지 뒤늦게 체감하고 있는 시절. 감춰져 있어야 할 이름들이 바깥에 나와 있는 『출판, 노동, 목소리』의 표지 앞에서 자꾸만 멈칫거리게 되었던 이유가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2. 전류를 흐르게 하는 운동

11인의 출판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출판, 노동, 목소리』를 함께 읽는 이 자리를 준비하며 책의 표제이기도 한 ‘목소리’를 ‘수신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출판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이 책을 어떻게 수신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데모:북>의 작업이 어떤 목소리를 수신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나를 이끌기도 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귀를 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듣기란 건네는 이야기를 넘겨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야 한다. 그것은 들어(listen) 올리는(lift up) 일이다. ‘들어-올리기’를 통해 다른 곳으로 이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는 것, 그것이 수신(受信)의 숨은 뜻이라 생각한다. 목소리의 자리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수신할 수 없다. ‘갑’과 ‘을’의 자리를 일시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를 내어주는 일’을 통해서만 ‘목소리의 수신’이 가능하다. ‘자리 내어주기’는 몫을 재분배함으로써 박탈되었던 권리를 찾는 일이며 ‘목소리의 사각지대(死角地帶)’를 수신이 가능한 영토로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목소리에 자리를 내어주는 일, 목소리를 수신하는 일, 다시 말해 목소리를 들어-올릴 때 그것은 진동 한다. 다른 곳에 영향을 주는 파장이 되고 전류가 된다. 목소리를 전류로 흐르게 하는 일이 바로 수신 하는 일이다. 잠깐 전신주가 되어 그 목소리-전류를 흐르게 하여 다른 장소로 전하는 일. 그렇게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진동할 수 있게 이어주는 일은 <로컬데모>가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출판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수신하는 것이란 책과 관련된 수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들리지 않던 목소리)을 수행해온 이들이 교류할 수 있는 전선(電線)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중심에 놓아두거나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목소리가 흐를 수 있는 경로를 구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축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바닥 공사부터 시작해야 하는 지난한 건축적 과정과는 다르다.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거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동력을 생성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소리를 수신하는 것’만으로도 각자의 고유한 전류를 흐를 수 있게 한다. ‘수신하는 것’은 ‘자리를 내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것은 각자의 목소리가 흐를 수 있도록, 그 흐름을 지속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일이다. 목소리가 다른 곳에 닿을 때, 다른 것과 만날 때 그것은 전류가 된다. 동작을 멈추었던 장치가 가동하고 꺼졌던 등불이 다시 불을 밝힌다. 목소리를 수신하는 일이 발전기를 돌리는 운동과 다르지 않음을 새삼 새기게 된다.  

 

3. 빈곤한 목소리들의 교차

이 책을 읽으며 얼마간의 <로컬데모> 활동을 돌이켜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수사(修辭)’들을 빈번하게 만나게 된다. 모른 척 해야 할 것이 아니고 서둘러 버려야할 것도 아니지만 돌부리처럼 자꾸만 그 앞에서 멈춰 서게 되는 장애물과 같은 수사들. 그건 글로 많은 걸 표현해왔던 그간의 이력 속에 감춰져 있던 어떤 빈곤 혹은 편향됨과 마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역문화예술인들의 권리 수호를 위한 협의체. <로컬데모>라는 이름 앞에 내세워두었던 그 말과 자주 마주하게 된다. 문화예술인들의 ‘권리’란 무엇인가? 그 실체를 구체화할 수 있어야 협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야 협의(協議)가 허울뿐인 협의(狹義)가 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침해당하고 있는 권리를 지키고, 빼앗겼던 권리를 되찾는 일을 함께 하자고 요청할 때의 건넬 수 있는 말의 목록이 빈곤하다는 것을 매번 느낀다. 다급할수록 수사에 기대고 있음을 환하게 알게 된다. 그런 상태를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런 상태에서 시작해야 하고 요청해야 하고 타전해야 한다.

그래서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만 같다. 자주 무기력해지고 응답 없음을 원망하게 된다.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침탈당하고 있지만 결국 개인의 문제이거나 불행하고 안 된 일로만 여겨지고 있는 막연한 일들을 명징한 사태로 마주하자는 그 말건넴의 빈곤함이 가리키는 것은 말(수사)의 문제일까? 말의 전해지지 않음 속에서 나는 이곳의 감춰진 빈곤함을 생각하게 된다. 당사자가 아니면 말할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상태, 관계의 빈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누구와 함께 그 일을 해야 할지, 어디에 이런 사태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야할지 알 수 없는 환경의 빈곤. 오랜 시간동안 이러한 빈곤을 당연한 것이라 내면화해온 상태의 빈곤, 달리 말해 생태의 빈곤.

내 언어의 빈곤함과 반복적으로 마주하다보니 또 다른 빈곤과 만나게 된다. 나의 빈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처럼 또 다른 빈곤 또한 모른 척 할 수 없다. 빈곤한 그 상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빈곤한 말을 포기하지 않고 밑천으로 내어놓는 것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출판, 노동, 목소리』에서 내가 들었던 것처럼 목소리를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기꺼이 ‘고백’이라는 날 것의 목소리를 발신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목소리 하나를 여기에 옮겨둔다.  

“그러니까, 나는 고백하고 싶었다. 자판기 뒤에 사람이 있고, 책 뒤에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고.”

―정유민, 「자판기 뒤에 사람 있어요」, 132쪽. 

 

여기서 말하는 ‘고백’이란 솔직한 심정을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편집자적 자의식’을 내려놓은 ‘자기 목소리’를 가리키는 것에 가깝다. ‘책’이라는 ‘숭고한 대상’을 만드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감추고 지움으로써만 책을 더욱 신비롭고 가치 있게 만드는 이가 아닌 바로 그 책을 만들고 있는 ‘노동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뜻이리라. 정치적으로 올바른 ‘책이라는 상품’을 만들어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는 그 행위 자체가 가치 있음을, 그것이 ‘노동’이라는 낮은 자리의 말임을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올바름이라는 가치는 ‘책’에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만드는 일련의 공정, 다시 말해 책을 둘러싸고 있는 ‘생태’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빈곤하고 미약한 목소리들이 책의 생태를 지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책 만드는 사람의 자의식에 빠져 눈을 질끈 감고 그것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애써 외면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건 마냥 사치스러운 일”(130쪽)이었음을 고백하는 일은 자신이 책 뒤에 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목소리를 발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출판노동자들이 ‘편집자적 자의식’을 내려놓고 그동안 방치했던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접하며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집자적 자의식을 내려놓았다는 것은 책이라는 숭고한 대상을 만드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가치 있는 노동으로 책이라는 공유재를 만드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재명명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각자의 직무적 사명감을 서둘러 내려놓는 것이 능사는 아닐 테지만 그 사명감이라는 게 근본적인 무언가를 가리고 있었다면 뒤늦게라도 마주하고 또 응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문해본다. 내게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란 무엇일까. 그건 ‘응답의 의무’ 같은 게 아니었을까. 혹은 ‘응답으로서의 말하기’에 맹목적이었던 것이 아닐까. 모든 요청에 대해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의식이 얼핏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과잉을 낳은 것은 아닌지 홀로 되묻게 되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무기력’의 정체 또한 어쩌면 나조차 모르는 사이에 과잉되어버린 자의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란 바꿔 말하면 ‘원고를 청탁 받는 사람’일텐데 그건 결국 어떤 조직과 체제로부터의 호출에 응답하는 일이다. 그러니 글을 쓰는 사람의 ‘무기력’은 ‘응답(능력)의 빈곤’으로부터 연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디로부터도 호명되지 않는 조건이나 누군가로부터의 호명을 기다려야만 응답할 수 있는 수동성에 있기도 할 것이다. 거듭 자문하게 된다. 그간 애써 써왔던 글들이 어디로부터, 누구로부터의 응답이었는가.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 때문에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또 무엇을 묵살했고 무엇을 외면했던 것일가. <로컬데모>라는 ‘지는 싸움’을 하며 글쓰기를 통해 행했던 그간의 싸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응답과 묵살, 회피와 소문, 비아냥과 힐난이 번성하는 지역이라는 현장에서 더욱 명징해지는 것은 ‘패배의 감각’이다. 그런데 묵살이 명징해질수록, 소문이 번성할수록, 비아냥과 힐난이 거셀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싸워야할 대상이 추상화된 개념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구체적이고 명징한 실체라는 것. 그보다 더 힘써야 할 것이 <로컬데모>가 만나 할 이들이라는 것. 곳곳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하고 있는 구조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의 장소를, 오늘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무릅쓰고 말해본다면 패배가 재산이 되고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패배가 작은 매듭이 되고 또 매개가 될 수 있다면, ‘글 쓰는 사람의 자의식’을 서둘러 철회할 것이 아니라 ‘응답의 의무’의 자리에 ‘지는 싸움을 거듭 행하는 것’이라는 패배의 이력을 덧대어 새겨두고 싶다.

출판노동자(들)의 말을 이어 받아 계속 이야기해보자. 그들(만)의 말이 아니라 이곳으로 도착하고 있는 말이며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는 말로 전유하며 인용해둔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출판이란 무엇인지 늬들이 알랑가 모르겠지만 내 말을 잘 들어’ 화법에 익숙한 세대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곁에 있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131쪽) 이 낮은 목소리를 따라 다른 목소리가 흘러든다. “우리는 서로를 확인했다.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우리들’의 존재를.”(132쪽) 

 

4.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

『출판, 노동, 목소리』를 읽으면서 잊고 있던 한 권의 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프로파간다에서 펴내고 있는 ≪GRAPHIC≫ #28 BOOK DESIGN ISSUE VOL.2(2014). 책 디자이너들의 인터뷰와 디자인 화보가 실려 있는 이 독립잡지를 작년 이맘때쯤 독립출판디자인그룹 ‘그린그림’의 박성진 씨로부터 선물 받았었다. 『출판, 노동, 목소리』와 달리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북디자이너들의 글엔 ‘노동’에 관한 내용은 전무하다. 그 이유를 각자가 놓여 있는 위치(처지)의 다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그건 분명 ‘부재’ 하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기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맵시 있고 매끄러운 책의 디자인에 관한 곳에 ‘노동’이 들어가는 게 어색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출판, 노동, 목소리』엔 자신의 작업물에 대한 가치와 성취, 그리고 미학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 또한 부재의 자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 두 권의 책에서 내고 있는 목소리는 서로를 향해 부재의 자리를 가리키는 좌표로 삼을 수 있다. ≪GRAPHIC≫에 부재하는 ‘노동’과 『출판, 노동, 목소리』에 부재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서로의 목소리를 겹치게 할 때 그 부재의 자리가 분명해진다.

부재의 원인은 ‘결락’이나 ‘부족함’이 아니라 어떤 목소리의 진입을 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트’의 존재다. 『출판, 노동, 목소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디테일하고 미적인 부분에 관한 목소리까지 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나는 이 두 책이 서로를 교차하며 드러내고 있는 ‘부재의 자리’가 바로 이곳의 출판 생태를 가리키는 표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교차하는 일, 매개하는 일의 가장 중요한 점이 ‘체력’임을 알게 된다. 「체력론: 글, 체력, 출판에 대한 소고」(김신식)에서 내가 읽게 되는 것은 한 편집자의 사적인 회고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편집자가 될 수 있어야 함에 대한 역설이다. 필자의 원고에 대해 의견을 요청하는 것처럼 시스템의 개고(改稿)를 부단히 요청할 수 있는 체력이 있어야 한다. 필자의 글을 빌려 의견을 전하는 ‘2차 진술자’처럼 감춰진 문제를 드러내고 억압되었던 목소리가 뻗어나갈 수 있게 매개하고 교차할 수 있어야 한다. 매개와 교차는 기술이 아니라 노동이다. 무기력해지지 않는 체력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러니 ‘부재하다’는 빈곤의 표지는 매번 어떤 깃발을 흔들며 이곳으로 보내는 신호다. 그 부재의 신호를 누가 발견하고 또 누가 응답할 수 있는가. 지금 목소리를 발신하고 있는 사람, 누군가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먼저 들을 수 있다.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가 결국 누군가를 먼저 돕는다.

 

 

<데모:북> 2회_문화매개공간 <쌈>_2015. 10. 30

 

 

 

 

<로컬데모> 성명서 보고

: 89명의 목소리에 대해 신생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로컬데모>는 시 전문 계간지 <신생>에서 발생한 편집위원 권리 박탈 사태에 항의하고 다만 문제제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해명과 사과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이를 공론화하기 위한 성명서를 작성하여 지난 20151031블로그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서 여러 분들께 지지를 요청한 뒤 20151115일을 기해 지지 성명을 마감했습니다.


그 결과 20151116일 오전에 참여하신 한 분을 포함하여, 89분이 <로컬데모> 곁에서 응원과 격려의 말을 전해주셨습니다. ()독자, 자발적 백수, 주부, 연구자, 문학인, 대학생, 대학원생, 작가, 예술가, 비평가, 시인, 소설가, 글쓰기, 비정규 교수, 교수, 기획자, 활동가 등등 활동의 반경은 모두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신생>에게 절차상의 문제와 사과에 대한 요구 그리고 이후 사태에 대한 재발방지를 함께 강력하게 주문하셨습니다.

 

89분의 다양한 목소리를 <로컬데모>가 잘 마름질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것이 성명서라는 형식을 통해 제안되었고 응답을 받은 이상, <로컬데모>의 말로 재정리되어야 할 게 아니라, 고스란히 <신생>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성명서는 문건으로 작성, 출력하여 <로컬데모>의 입장을 덧붙이는 것 없이 <신생> 측에 고스란히 우편으로 전달을 했습니다. ‘블로그페이스북 페이지에 공개될 성명서 링크를 확인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기도 하고 성명에 참여해주신 분들의 이야기를 물리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일 역시 <로컬데모>가 해야 할 과정이라고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성명에서 기록된 이름과 전하는 말의 생생함과 무게를 <신생> 측 역시 감지하기 위해선 실물로 받는 일도 중요하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참여하신 분들의 이름과 말들이 <로컬데모><신생>에게 향하고 있는 이상, 이 문제는 함께 마주하는 일 외에는 더 이상 도리가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로컬데모>는 이 사태가 어떤 진영과 적대를 구성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로컬데모>는 그간 <신생>이 해온 일을 폄하하거나 부정하고 앞으로 이 잡지가 갖는 지향이 사기라거나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역 내에서 자연화되어 있는 관행이나 구조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문제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로컬데모>가 성명서에서 요구한 두 가지 사항이 공식적인 사과와 재발방지에 대한 약속인 것은 지역의 문화, 예술적 장에서 이루어지는 실천들이 암묵적인 공모나 카르텔이 작동하지 않도록 하는 표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컬데모>의 이 활동을 아주 사소하게 여기는 시선이 있겠지만, <로컬데모>는 바로 이 영역에서 시작하는 일이야말로 지역과 지역에서 발생하는 부당한 논리와 시스템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로컬데모> 성명서는 이를 첫 단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생>의 응답을 지켜보고 그에 따라 또 성명에 참여해주신 분들께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소식을 전해야 할 의무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번거롭고 귀찮은 소식이 전해지겠지만, 곁에 서 주셨다는 데에 용기를 얻고 이외의 다양한 문제들에도 관심을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로컬데모> 드림

2015. 11. 27.

 

 

<참조>

성명서 최종결과입니다.

http://bit.ly/1Of06fI

 

로컬데모 성명서

시 전문 계간지 ≪신생≫의 사과와 시정을 요구한다

2015년 7월 1일,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잡지 발간을 위해 애를 써왔던 시 전문 계간지 ≪신생≫의 편집위원 두 명(김대성, 김만석)의 편집위원 권한이 당사자인 두 사람을 제외한 자리에서 공모해 강제로 박탈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신생≫의 구성원들(발행인-서정원, 편집인-이규열, 편집주간-김경복, 편집위원-김수우, 김참, 이성희, 황선열, 편집장-이은주)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문제 제기를 했지만, 일관되게 묵살해왔다. 김대성, 김만석은 부산 지역 문인들의 권리 보호를 위한 공적 기구인 ‘부산작가회의’에 이 일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를 사적인 개별 사안으로 규정하고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했을 뿐이다. 하여, 지역문화예술인들의 권리 수호를 위한 협의체 <로컬데모>를 통해 대응하고자 한다.

최근에 발간된 ≪신생≫ 64호(2015, 가을호)에 짧게 언급된 김대성, 김만석에 관한 내용은 사실 관계를 왜곡했을 뿐 아니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신생≫ 구성원들의 태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래에 그 내용 전문을 첨부한다.

"≪신생≫ 내부의 일을 전하고자 한다. 그 동안 편집위원으로서 잡지 편집을 함께 했던 김만석 김대성 두 편집위원이 내부적 사정으로 이번 가을호를 기점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그 동안 잡지 발간에 노고가 컸던 두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며, 나간 이후의 앞으로의 일에 많은 축복과 발전이 있기를 기원한다.”
— 편집주간 김경복

얼핏 두 사람에 대한 노고를 치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편집위원직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언급은 당사자들과 그 어떤 논의도 없이 내부 공모로 편집위원 권한을 강제로 박탈한 사실 관계를 왜곡하고 있다. 두 사람이 어떤 이유로 그만두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없이 마치 자의에 의해 그만두게 되었다는 문맥으로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에게 전하는 노고와 감사의 언급 또한 ‘<신생> 사태’에 대한 책임과 사과 요구를 일관되게 묵살해온 ≪신생≫ 측의 기만적인 태도를 반증하고 있을 뿐이다.

김대성, 김만석이 요구해왔던 것은 허울뿐인 감사와 축복의 말이 아니라 편집위원 권한 박탈에 대한 ≪신생≫ 측의 해명과 사과였다. 해당 잡지의 구성원이 제기하는 정당한 문제제기를 묵살로 일관하는 행위는 지역문학장의 민주주의 가치를 침해하는 행위임을 인지하기 바란다. ≪신생≫은 이 사태에 대한 묵살의 태도를 중단하고 지역문학을 이끌어온 지난 역사의 가치를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하기 바란다.

사실 관계를 은폐하고 왜곡하는 기만의 문장 또한 역사의 한 부분으로 기억된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았으면 한다. 오늘의 ‘묵살’ 또한 어딘가에 틀림없이 기록된다. <로컬데모>는 시 전문 계간지 ≪신생≫ 현재 구성원들의 기만을 규탄하며 묵살로 일관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기록해 누구라도 열람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우리는 두 사람의 편집위원 권한을 강제로 박탈한 ‘<신생> 사태’를 지역문화예술장의 폐쇄성이나 독점적 권력이 남용되고 있는 문화적 낙후성의 증표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묵인해온 ‘묵살의 구조’를 해체하고 권리의 사각지대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왔던 문화예술인들의 권리 수호를 위한 동력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발명해낼 것이다.

<로컬데모>는 지역문학장의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고 있는 시 전문 계간지 ≪신생≫의 기만을 규탄하며 아래와 같은 사항을 요구한다.

하나, 시 전문 계간지 ≪신생≫은 김대성, 김만석 두 편집위원의 권한 박탈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시정하라.
하나, 시 전문 계간지 ≪신생≫은 사실 관계를 왜곡한 64호의 내용을 철회하고 해당 잡지에 김대성, 김만석 두 편집위원의 권한을 강제로 박탈한 내용과 이를 시정한 내용 및 사항을 소상히 밝혀 게재하라

2015. 10. 17.
지역문화예술인들의 권리 보호를 위한 협의 구성체
<로컬데모>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컬데모>의 성명서에 여러분들의 연대서명을 요청합니다.
아래 항목에 각자의 목소리를 담아주시길 바랍니다.

로컬데모 성명서
연대서명하기



파업학교, 해고학교

이창근 이창근의 해고일기 오월의 봄, 2015

 

 

김만석(로컬데모)

 

1.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내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현장을 걷고 쓴 기록이면서 현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량의 지혜를 기록한 보고이자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의 종류가 다양해졌다고는 하지만, 노동자들의 권리 요구와 항의를 담담하게 기록하고 그것을 나누어 읽을 수 있는 저작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책은 투쟁지침서이자 파업지침서이고 해고 대응지침서라는 점에서 굳이 평가를 내리기보다 무엇을 더 정교화할 수 있을 것인지를 파악하는 게 중한 일로 여겨진다. 달리 말해, 어떤 싸움이 미래와 방향이 가늠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리고 싸움을 멈출 수 없고, 멈추어서도 안 될 때, 이 책은 패배를 예감하고 쓰러진다고 해도, 다리 무릎에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희망적 저작이면서 패배로 좌절하거나 무력하게 싸움의 대상에 대해 돌아서지 않도록 만드는 강력한 바탕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에 온통 무기력과 패배와 죽음이 넘실거리고 있음에도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들의 흐름을 과잉되게 정서로 고착화하지 않고 거의 초인적인 지구력을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이 책의 어느 페이지에서도 읽는 바로 그 순간에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을 단순한 희망적 교과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교과서가 어떤 사안에 대한 인과적인 설명에서부터 그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해석 그리고 규범적이고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여러 메커니즘을 하나씩 알려주는 것이라면, 이 책은 노동자들이 처하게 된 재난과 그것에 맞서 싸우는 일련의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아주 다양한 정서적 결의 흐름에서 신체의 문제, 관계의 문제까지를 조목조목 기록해 놓고 있어 그것을 만나는 것은 독자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든다. 달리 말해, 노동자의 삶에 재난이 닥친다는 것은 단순히 위기가 찾아왔다는 말이 아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도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근거 없는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해고에 맞서는 일은 생계의 가능성을 의문에 붙이는 일이 될 뿐더러, 기왕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살에 이르는 길까지 말이다.

실은 그런 일련의 과정들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인 해고에 대응하고자 할 때마다 무지막지하게 전개되는 폭력의 발생을 저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난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도입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 노출된다는 것을 이 책만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사측에서 고용한 용역에서부터 지배적 미디어의 침묵과 묵살은 기본이거니와 노동자 내의 분열을 책동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폭력들이 만연하고 이를 미래 세대라고 일컫는 아이들에게까지 노출시켜야만 한다. 그러니 해고는 단순히 직장에서 일자리를 잃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그 노동자가 소속된 공동체 자체에 대한 파괴에까지 이르게 된다. 해고 노동자들의 심리치료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폭력이 미치고 난 뒤에 이를 극복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이를 넘어서는 것은 도무지 가능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기 마련이다. 누가 파업에 선뜻 나설 수 있으며 해고에 맞서 투쟁에 이를 수 있는가.

 

2. 그렇지만 책은 희망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좌절하지 않는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되지 않는 국면이 있기 마련이다. 파업의 순간에도 해고의 순간에도 말이다. 매 순간마다 희망은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현장들로부터 비롯된다는 단순한 사실이 항상 나타난다.

 

쌍용차 파업으로 지역은 풍비박산이 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만의 기우였고 괜한 걱정이었다. 지역 노동자들은 건강했고 활기를 잃지 않았다. 움츠려 있는 우리에게 아침저녁으로 함께하는 열성을 보여줬다. 그 작고 소중한 연대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설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들의 노력은 지금까지 한결같이 이어지고 있다. 촘촘한 인간 관계망이 추락방지 그물이 되어 그나마 맨바닥과 거리를 만들어줬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이야말로 다시 일서설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돼 줬다.”(52)

 

무엇보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이런 주위의 도움을 통해 무릎을 다시 펼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쌍용차 투쟁을 통해 정리해고의 문제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고 나아가 언제든 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공공의 문제란 사실을 말해줄 때 우리는 힘이 났고 용기가 생겼다. 불안정한 고용판 위에 있는 우리들은 재수가 없거나 운이 나빠서라기보다 이 시스템이 운용되고 유지되는 한 언제든 갈라지고 벌어진 틈 사이로 추락할 수 있다. 이런 부분을 말해주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지치지 않게 만들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싸움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 질긴 싸움에서 가장 큰 우링릐 정당성이 훼손되지 않았다. 그것이 보존되고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앞으로 한발 더 나가게 만들었다.”(55)

 

실제로 지금까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쌍용차의 오너가 된 인도의 마힌드라 회장을 만나기 <희망 비행기>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모금을 통해 인도로 건너가 복직 요구를 직접하고자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쌍용차 사태는 회사의 재정 건정성과 아무 상관이 없었던 기획도산이라는 사실이 법적으로 밝혀졌고 이는 파업에서 해고에 이르는 순간까지 쌍용차 노동자들이 끝까지 주장했던 사실이었다. 지배적 미디어나 세간의 냉소들이 귀족노조를 부정하고 멸시하는 것으로 나아가며 갖은 수모를 겪었지만, 포기할 수 없는 객관적 근거를 이들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22명의 죽음은 투쟁의 기간이 지속되면서 저지하기 어려운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입은 트라우마는 여전히 완치되지 않고 치유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해고자는 많이 걷는다. 걸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이 길이 맞는지 묻고 또 묻는다. () 걷는 것에 충분히 집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걷는 이들의 몫이 아닌가. 쌍용차 노동자들은 여전히 걷고 있다. 방향을 그리기엔 걷는 것 자체가 너무 버겁다. 우선 우리는 최선을 다해 걷고 또 걸을 것이다. 이제 해결의 방법은 함께 찾아보자. 걷는 우리가 모든 걸 떠맡을 순 없지 않는가. 쌍용차 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생각하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65)

투쟁의 방식이 다만 분노와 증오로부터 되지 않고 사랑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즐겁게 투쟁하고 기쁘게 사랑하는 것. 몸을 가볍게 하는 것, 힘을 빼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이것이다. 살아남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그렇게 살아갈 때만이 인간의 존재는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풍부화된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죽음이 내게 준 지침이다.” (83) 동료의 죽음으로 향냄새가 익숙해지고 술에 항상 취해 있었음에도, 노동자들은 사랑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누군가의 죽음이 좌절과 허무로 이끌지 않고 더 많은 사랑과 기쁨으로 나아가도록 만든 지평이라고 알려준다.

 

3. 이른 바 노동자들의 글쓰기가 특별한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창근의 글쓰기는 파업과 해고투쟁이라는 노동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노동의 현실을 포착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 그것이 노동이라는 기왕의 규범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실감으로 드러내고 있어, 이전의 노동자 에세이와는 다른 지점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노동 활동 영역 내에서의 글쓰기보다 노동자들이 파업과 해고를 통해 스스로가 노동자 됨을 인지하는 과정이 훨씬 증대되고 있다면, 노동자 글쓰기의 미래는 파업과 해고투쟁의 과정에서 산출될 것이라는 묘한 생각을 갖게 만든다. 심지어 노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노동자로 보이지 않게끔 하고자 하는 태도가 없지 않다면, 파업과 해고투쟁의 순간에 노동자로서 세계에 대해 재성찰하는 표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파업과 해고투쟁은 언제나 노동자를 길러내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속시키는 권리를 발명하게 하는 학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이 파업에서 해고로 이어지면서, 학교의 범위는 공장에서 공장 바깥으로 점차 확대되었고 지역사회와 한국사회 전체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만 봐도 얼마나 영민하고 기민한 학교가 만들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공동체적 결속과 유대, 사랑과 우정의 가능성이 저 학교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핵심 과목이다. 물론 그 사이에 좌절이나 사회의 전반적인 냉대와 동료들 내부의 균열들을 모두 감내하는 과정들이 고통으로 엄습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우정과 사랑에 대한 호소는 늘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먼저 가닿는 법이지 않던가. 우리가 늘 손을 건네는 것은 강자나 부자가 아니라 빈자들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빈자들이 손과 고개, 마음을 서로 건네고 동료가 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이유 역시 무수히 많을 것이다. 무수한 그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손을 잡지 않은 사람들은 강자가 되거나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빈자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더 많은 빈자들이 학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책에 나와 있듯이 희망버스와 같은 기획일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이 마음의 끈을 이을 수 있도록 하는 촛불집회와 같은 방식이나 열린 추모제의 형식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발명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발명해야 하는 것도 빈자들의 몫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래서 모든 빈자들의 삶은 쌍용자동차 사태와 연관되어 있고 한국의 곳곳에서 발생하는 갖은 투쟁은 빈자들의 공통 몸싸움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사실 아무도 그 몸싸움의 장소에서 퇴근한 사람은 없는지 모른다.

 

4. 한국사회의 다양한 사업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파업과 해고의 칼바람은 앞으로도 훨씬 가속화할 예정이다. 징계해고, 통상해고, 정리해고에 일반해고까지 가능하게 된 현재의 노동 조건은 사회 전체를 파업과 해고투쟁의 학교로 전환하도록 요구하는 것인지 모른다. 부문별 투쟁에 한정되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이어질 노동에 대한 멸시와 무시, 권리 박탈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노동이라고 여기지 않은 장으로까지 확장되도록 요청하고 있는 형편이다. 가령, 문화와 예술의 장에서 일어나는 갖은 권리 침해나 박탈 그에 따라 이루어지는 침묵이나 은폐, 해고의 경우도 이의 연장선상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아직은 문화인과 예술인들의 문제제기나 관련 직업군의 일부분에서만 자신들의 행위를 노동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창조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행위와 결과를 노동과 노동의 결과로 결코 볼 수 없다고 여기는 탓이다. 이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전개되어야 하겠지만, 문화, 예술이 제작되는 과정과 이를 둘러싼 갖은 행위들에서 제대로 발화되지 않은 노동의 영역들이 잠복해 있다면, 이를 하나씩 검토하는 일이 문화예술인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전개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퇴근은 가능한 것일까?

다행인 자들의 잠재성

<데모:> 1(이창근, 이창근의 해고일기, 오월의 봄, 2015) 후기

김 대 성(로컬데모)

 


 

우리 모두는 싸움과 투쟁이 일상화 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모든 싸움과 투쟁은 규모와 대의를 통해 규정되곤 하지만 싸우고 있는 이들은 알고 있다. 규모와 대의보다 더 힘이 센 것이 있다는 것을. ‘현장말이다. 모든 싸움과 투쟁은 현장()이 증명한다. 그런 이유로 싸움과 투쟁을 하는 이유는 이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빼앗긴 현장을 탈환하고 지키는 것이 오늘날 모든 싸움과 투쟁의 첫 번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로컬데모> 또한 현장을 다시 찾아 지켜내고자 한다. 우리 주변의 싸움과 투쟁, 대의나 규모에 포착되지 않는 다양한 움직임들을 주목하고 불러내어 각자가 놓여 있는 현장()을 공유하는 자리가 필요하다. 개별화되고 차단되어 있는 각자의 현장을 만나고 감응하는 일부터가 어쩌면 싸움이고 투쟁인지도 모른다 

이창근의 해고일기(오월의 봄, 2015)를 읽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싸움과 투쟁의 현장에서 을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다급하고 절박한 현장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글을 쓰는 일. 그것은 무력감과 절망의 증표가 아니다. 싸움과 투쟁의 현장에서 쓴다는 것아직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창근에게 글은 대개 구조 요청의 의미로 씌어진다. 이 구조 요청은 위기 상황에 놓여 있는 이가 바깥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쓰는 구조 요청은 이곳이 위기 상황임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창근의 해고일기가 비슷한 말을 오랜 시간동안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은 지금-여기-우리의 위기를 지루한 반복쯤으로 여기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냉소와 환멸. 그것은 대체로 위기가 아닌 구조 요청을 향하기 마련이다. 그러는 편이 더 쉽고 간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말해야 한다. 반복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가 반복하고 있다고 심드렁하게 말해버리는 우리라는 것을 

냉소와 환멸의 반복을 뚫어내며 이창근은 말한다.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지역과 내 삶에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야”(112) 한다고. ‘토대를 바꾸고 기반공사를 다시 하는 일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 목소리를 구조 요청의 반복 속에서 길어올린 사유라고 해도 좋다. 싸움과 투쟁의 현장이 노동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다. 노동자에게 글을 쓰는 일이란 하지 않던 일을 갑작스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기어코 알아내어 하는 일이다. 투쟁과 싸움 또한 그런 일일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의 사실을 배우게 된다. 투쟁과 싸움 또한 그런 일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일을 기어코 알아내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공부와 투쟁을 병행하는 노동자’, 그런 노동자가 기어코 말한다. “투쟁하는 노동자는 자본의 치부와 비밀을 가장 많이 아는 학자이며, 니체의 말처럼 철학은 망치로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철학자다.”(114)

  노동자는 위기의 시대, 더 정확하게 말해 구조 조정의 시대를 살아가는 잠재적인 학자이자 철학자다. 시스템이 허용하지 않은 싸움과 투쟁을 할 때 그 잠재성이 드러난다. 힘겹게 증명된 이 진실 앞에서 질문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 예술가의 잠재성이란 무엇인가? 오늘, 시민의 잠재성이란 무엇인가? 잠재성이라는 공통성을 탐색하기 위해 다시 고쳐 물어야 한다. 지금-여기-우리의 싸움과 투쟁은 어떤 모습인가? 구조 조정의 시대에 저항하는 싸움과 투쟁의 현장 속에 각자의 잠재성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의 공통 싸움과 투쟁은 각자의 잠재성을 만나게 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창근은 20096월 공장 점거 투쟁 중 누군가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자동차를 만들어보면 어떨까?”(119) 파업 공장 안에서 노동자가 자동차를 만드는 일을 이창근은 꿈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저 너머에 있는 요원한 일이 아니라 코앞에 있는 잠재성이기도 하다. 기타를 만들던 해고 노동자들이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으로 활동하는 사례를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이 결성한 밴드 콜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페이지의 한 귀퉁이에 나는 이런 메모를 남겨두었다. ‘지역문화예술인들의 권리 수호를 위한 협의체 구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로컬데모>는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의 잠재성을 깨우고 실현할 것인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글로써 기록하면서 더 단단해지고 강해진다. 그 힘이 이곳을 조금 더 넓은 곳으로 만든다. 넓다는 것이 규모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하는 일, 보이지 않던 길을 내는 일을 통해서만 없던 영토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누가 그 일을 하고 있는가. 이창근은 해고자의 나이테에서 그 흔적을 찾는다. “생장 조건과 변화를 나무 스스로 기록하는 나이테는 기후조건이나 환경 변화, 특정한 사건의 압축 기록물이자 블랙박스이다.”(214) 해고자의 나이테엔 오욕의 역사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둥글 어깨 겯고 걸어가는 동심원의 나이테”(215)에 씌어져 있는 기록을 읽어야 하는 이는 우리다. 오늘의 우리는 (해고) 노동자들의 언어를 빌려 쓰고 있다. 억압 받고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 기대어 침몰한 세계에서 겨우 균형을 잡고 있다. 그러니 그 힘에 기대어만 있을 것이 아니라 그 힘을 밑천으로 기울어진 이 세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힘의 잠재성, 연대의 힘으로 말이다.

  끝없이 침몰하는 세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순 구분법은 무용해진지 오래다. 살아남은 우리는 잠정적 피해자인가, 아직 순번이 돌아오지 않은 피해 대기자인가? 피해자와 다행인 자가 있다. 우리는 아직 다행인 자다. 다행인 자의 유일한 동료는 피해자다. 마찬가지로 피해자의 유일한 동료 또한 다행인 자이다. ‘-관계라는 도식에서 민주주의는 요원해보인다. ‘은 점점 더 막강해지고 그만큼 염치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갑을 향해 잘못에 대한 인정과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갑이 바뀌지 않는다면 을이 바뀌어야 한다. 을들의 변화를 통해 -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파쇄해야 한다. ‘을들의 민주주의를 발명해야 한다. ‘-을 사이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을들 사이의 민주주의도 필요하다. ‘을들 사이의 민주주의란 연대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연대란 엇갈림과 뒤엉킴, 무수한 갈등의 긴장을 벼텨내는 끈을 아귀힘으로 붙들고 있을 때만 지킬 수 있다. “노동자 사이를 갈라놓은 건 자본이지만 그 틈을 메우고 살아가는 건 우리들의 의지다.”(368)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만남을 주저하지 않는 것, 앞질러 절망하거나 피로해지지 않는 것, ‘을들의 민주주의는 그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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