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아(부산대 비정규 교수)


1.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루하루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좀처럼 표현되지 않고, 표현되어도 전달되지 않고, 전달되어도 응답되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든 타인의 이야기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우리는 아직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 모든 싸움들이 더 오래 지속되고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유, 전부는 아니더라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싸우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뇌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기껏해야 ‘그들’이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느낄 뿐 그 속내를 이해할 방법은 없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고립이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확인하는 체험이며 그런 체험이 반복될 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오래 싸운 사람들이 고집불통으로 보이고 실제로 그런 면모를 지니게 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고립된 한 사람이 기댈 곳이 자기가 옳다고 여겨온 신념밖에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더욱더 고립될 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거기에 지지 않겠다는 의지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욕망이 남아있을 때, 사람들은 펜을 들고 곁에 없으나 어딘가에는 있을 동료를 향해 말을 건넨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309동 1201호 지음, 은행나무, 2015)를 그렇게 건네진 말들로 읽는다.   

2. 이 말들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학이라는 곳이 익숙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데, 그 일차적인 이유는 아마도 대학을 일터라고 여기지 않거나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여기는 데에, 그리고 특히나 연구하고 강의하는 사람들을 노동자로 보지 않는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대학원에서 생활하고 시간강사 일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책에서 그려진 상황에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다니는 곳보다 낫다’거나, ‘나는 운이 좋았던 건가 이런 상황은 말도 안 된다’라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 이 기록을 읽은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대학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그의 삶의 기록에서 보이는 고통스러움과 소소한 기쁨들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것과 그의 것을 비교하고 대조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들을 감지하면서도 눈 돌리기 힘든 이 말들의 힘은 역시나 자기가 겪은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에서 나오는 것. 그 기록 속에서 ‘연구하는 자’로서의 정체성과 ‘노동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이 분열되고 겹쳐지고 경합하는 ‘시간강사’의 독특한 경험의 자리를 확인한다. 그리고 대학이 이미 기업이 되어버린 상황 속에서도 시간강사의 삶을 결정하는 ‘노동’의 자리, 대학에서의 노동의 조건에 대해 꺼내어 놓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 시간강사들의 욕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그의 말에 답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그와 유사하거나 다른 경험들을 나열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그의 경험이 잘 보여주는 대학에서의 노동의 자리를 살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의 기록에 응답하는, 그가 바랐듯이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과 대학원에 적용될” 것인 이야기를 공론화하는 더 좋은 방식일 것이다.

그의 기록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맥도널드의 노동조건과 대학의 노동조건을 비교한 부분은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대학 밖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많은 공감을 얻었는데, 이 부분은 단순히 대학보다 맥도널드에서 일하는 게 더 낫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서로 다른 두 일터에서의 노동 경험을 기록하면서 시간강사의 노동 현장이 어떠한지를 드러냄으로써, 그 기록을 읽어가는 우리는 평소에 보고 싶어 하지 않던 대학의 착취 구조란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접근해 들어가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는 그의 요구, 쓰라린 그 고독의 시간이 담겨 있는 글 곳곳에, 이곳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 같이 보고 이야기를 좀 해보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그가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자신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대학을 보고 기록한 부분, 그곳에서의 일그러진 일상들을 기록한 부분이야말로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더욱 필요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3.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몇몇 부분을 발췌하여 이곳에 옮긴다. 

“2008년 봄, 석사 1기 시절, 나는 학과 사무실의 대학원생 막내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의무적으로 학과 사무실이나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그런데 학부생 조교들 역시 공강 시간을 제외하고는 사무실에 몸이 매여 있었다. 학부생 조교들은 평균 15~20학점을 들으며 일주일에 20시간 이상 근무했다. 그러면 한 학기가 16주인데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에는 근무가 없어 대략 13주, 도합 260시간 넘게 일하고 80만원을 받아 가게 된다. 지금도 이러한 시스템이니 최저 시급에는 한참 못 미치는 액수다. 나는 조교 실장에게 조심스레 학부생 조교들이 일하는 시간을 모두 합해보면 최저 시급도 못 받는 것 같네요, 했다. 그는 알아, 그런데 우리는 뭐 받고 일하냐,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당연히 또 그렇게 하는 거지, 하고 답했다. 그의 말을 요약해보면 대학원생도 같은 처지이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그러니까 당연하다, 라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구조의 밑바닥에 있는 ‘개인’이었고, 조직의 관행과 싸울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서 그저 아 그렇네요, 하고 마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쩔 수 없지, 하는 조교실장 역시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우리 학과는 형편이 나았다. 계절학기까지 알뜰하게 출근시키는 학과도 적지 않다고 해서, 나는 욕이 튀어나왔다.”(111쪽) 

 

“대학원 과정을 모두 수료하고 시간강사가 된 지금도,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기에도 빠듯하다. 생업인 강의와 연구가 생계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까닭이다. 강의실에서는 허울 좋은 교수님이지만, 4대 보험조차 보장되지 않는 4개월짜리 비정규직 노동자다.”(12쪽) 

 

“‘대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다. 대학원생에서 시간강사로 이어지는 착취의 구조는 이미 공고한 시스템으로 자리잡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을 가속화해온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다. 그런데 대학은 스스로에게 숭고함과 신성함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동시에 그 어느 집단보다도 기민하게 자본의 논리에 영합해왔다. 흔히 대학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하고 미루어 짐작하지만 대학은 그 어느 기업보다도 노동권의 치외법권 지대에 있다. 학부생과 대학원생 조교가 받는 거의 모든 보수는 학비 감면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조교 장학금은 등록금 인상 폭에 관계없이 10년 째 그대로다. 교직원과 함께 일하거나 교직원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지만, 최저 시급, 주휴 수당, 초과 수당, 4대 보험 등 노동자로서 받아야 할 기본적인 안전망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대학은 학생의 노동력으로 행정 공백을 채우고, 그들이 내야 할 수업료를 일부 감면해주는 방식으로 인건비 지출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동네 편의점도 노동부의 눈치를 보며 최저시급과 주휴 수당을 챙겨주는 형편임을 감안하면, 어떤 면에서 대학은 거리의 편의점만도 못하다.”(13쪽) 

 

“아마도 내가, 혹은 내 또래의 대학원생이나 시간강사들이 겪는 외로움의 근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반(半)사회적인 인간이다. 학생도 아니고 사회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듯한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반(反)사회적 인간이다. 다른 노동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 표면적으로 노동하고, 사회가 원하는 소득과 소비 기준, 그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한다. 일주일에 네 시간 노동(강의)하고 월급을 받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비난한다. 강의 준비, 과제 첨삭, 개인 면담과 같이 드러나지 않는 노동의 시간이 오히려 더 길지만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사회성의 결여, 사회에서 함께 동시하고 있으나 동시하지 않다고 느끼는 동시성의 비동시성, 이러한 외로움은 연애나 우정이나 가족애 같은 것으로는 극복되지 않는다. ‘사회적’이지 못한 존재는, 외롭다.”(66쪽) 

 

“누군가는 내게 ‘교수’가 되기 위해 ‘지방시’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 아닌가 묻는다. 그러니 본인이 그러한 삶을 선택했다고도 말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운 좋게 교수가 되면 모든 삶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잠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나의 하루하루를 갉아먹었고, 나의 현재를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격하해버렸다. 간신히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오로지 교수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강의실에서든 연구실에서든 노동자로 존재하기 위해 모두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236-237쪽) 

 

“지방시 이전과 이후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이 사회의 무수한 지방시 중 하나일 뿐이다.”(237쪽)

 

4. 페이스북에 이 책의 저자가 쓴 특별기고 <나는 시간강사다: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둡니다>(http://slownews.kr/49121)를 공유해놓았더니 한 선생님께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남기셨다. “시간강사를 그만두는 데도 인터뷰를 하는 경우가 다 있구나, 허. 우리들 대다수는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는데 시간강사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들었다. 불쌍한 사람은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나는 그 글을 읽고 한편으로 공감하면서도 “그러나 그가 과연 그만둔 것일까? 그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가 결정한 이 일이 쫓겨난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겪게 될 일”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주고받은 말에서, 다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곳의 대학에서 연구하고 강의하는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두려움과 우리가 직면한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살아남은 자와 쫓겨난 자. 쫓겨난 자와 떠나간 자. 대학구조‘개혁’이 진행 중인 지금 이곳의 대학에서 많은 시간강사들은 한편으로는 남아 있고 싶다는 욕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나가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하루하루 흔들린다. 그리고 좀처럼 방향을 틀 것 같지 않은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 속에서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대학’이란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느 순간 ‘대학’이란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가가 ‘능력’으로 여겨진다는 사실도 말해야 한다. 언젠가 ‘여기 아니면 내가 갈 데가 없는 줄 아나?’ 또는 ‘나는 뭐 여기서 일자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와 같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묘한 박탈감을 느꼈다. 그 말을 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그때는 가늠하지 못했다.

“이곳을 떠나고 싶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어서” 이 두 문장은 “‘난민’이 된 한국 청년”(강정석, <시사인> 429호)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기사에서 한 인터뷰이는 “내 일에서 보람을 느끼면서도 먹고살아갈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남자든 여자든 앞으로의 삶 정도는 계획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살면서 행복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느 하나도 충족되지 않는 나라에 왜 남아 있느냐를, 저는 오히려 묻고 싶어요.”라고 말하는데, 이 세 가지 요청이 그 자체로 어색하고 너무도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뿐일까? “‘대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다.”(지방시, 13쪽) 이 괴물에게서 빠져 나가면 또 다른가? 대학보다 더 넓고, 더 큰 똑같은 구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가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라고 사람들은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문제는 대학 안이냐 밖이냐가 아니다. 안에서 밖을 만들고, 그와 동시에 밖에서 안을 문제 삼음으로써 개입해 들어오는 과정이 필요하다. 대학이 괴물이라는 사실에 공감하면서도 안에서 싸우는 것이 답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답이다 라는 식으로 선을 긋고 서로 적대하기보다는, 안이든 밖이든 지금의 대학의 구조와 그곳에서의 삶의 방식을 문제 삼는 많은 말들을 만들어내는 일이 시급하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당연히 또 그렇게 하는”(지방시, 111쪽) 것을 그만두고 싶다는 것을 말하기. 그리고 그러한 종류의 ‘정치적인’ 말하기를 이어가면서 대학의 문제가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논의하기. 그런데 대학의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때 ‘탈조선’이 말해지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문제없는 곳이 어디 있는가”라는 의문과 무력감을 드러내는 반응들, “학교라는 곳, 이미 망가진 지 오래다. 새삼스레 우리가 왜 그곳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거기보다 급박한 문제에 직면한 곳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라는 질책들을 마주하는데, 그 반응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5.  지금 이곳에서 ‘학문’을, ‘예술’을 한다는 것,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곧 하게 될 몇 마디가 사람들에게 가장 이해받기 힘든 것임을 예감한다. 책을 읽는 중에는 “그래, 대학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시간강사들이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거나 잊고 싶어 하지”하며 공감하고 지난 시간들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면, 책을 덮으면서는 “아 또 한 사람의 연구자를 잃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이 책은 한 시간강사가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시간강사로 일하게 된 ‘나의’ 경험을 쓰고 있고, 그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의’ 연구와 생활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실상 연구란 개인의 것에 그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개인의 것이 아니다. ‘공공의 것’으로서의 ‘지식’이라는 생각을 놓치기 쉽다는 것도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다. 생각해보면, 역설적으로 ‘권력’으로서의 ‘지식’이라는 생각은 익숙한데, ‘개인’이 아니라 ‘인류’의 지식이라는 생각은 낯설다. ‘가난’도 여러 가지다. 나는 우리 사회가 한 명의 연구자를 잃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어떤 부분이 더 곤궁해진 것이라고 본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연구자가 맡고 있는 책임이라는 것은 공적인 앎, 인류의 앎에 기여하는 데 있는데, 이런 말은 현재의 대학 또는 사회의 상황을 보면 공허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6. 마이클 애플의 책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강희룡 외 옮김, 살림터, 2014)에 대한 장정일의 독서일기 <자유경제원이 왜 앞장섰을까>는 “국정화 논란에서 교육 자체를 고민해봐야 한다. 교육이 중립적이라는 것은 환상이다. 경제위기 때 정부와 보수 언론이 벌이는 교육 논쟁은 실업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고 기업이 원하는 ‘교육 설비의 재편’을 꾀하는 시도다.”라는 부제(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676)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던 대학도 이러한 시도 가운데 있으며, 소위 ‘대학구조개혁법’과 그것의 가장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타격을 받을 시간강사들의 노동조건을 변화시킬 ‘강사법’의 시행도 이러한 시도의 맥락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살펴야 한다. (이에 대한 다양하고 상세한 논의들은 <문화/과학> 82호 ‘신자유주의 대학’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http://cultural.jinbo.net/?p=1456 참고.) 

“신자유주의가 부상한 지난 30~40년 동안 교육이 정치적 정체성의 변화에서 주변부적인 것이 아니라 핵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회변혁의 장소로 그리고 사회변혁의 도구로 학교를 성공적으로 이용”한 것은 보수 우파였다. […] 거대한 사회·교육적 프로그램을 통해 보수 우파는 자유에 대한 대중의 상식을 차츰 바꾸어왔다. 즉 자유란 정치적인 개념이 아니라 규제받지 않는 시장 기능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납득시킴으로써 “‘사적’ 자본의 축적이야말로 공공선”이라는 것을 오늘의 사회 상식으로 만들어놓았다.” 

“교육이 신자유주의의 정리(定理)를 수용함으로써 학교는 학생들에게 개인은 성공할 수 있지만 모두는 성공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을 예습하는 훈련장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학교는 새로운 세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는 제도가 된다.”  

나는 지방시에서 반복되는 한 문장 “대학은 역행해야 한다”를, 지금 이 순간에도 행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무수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의 재편’의 흐름 속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다시 읽는다. 그리고 서경식의 『시의 힘』(서은혜 옮김, 현암사, 2015)에서 읽은 “지배층의 이야기(Master narrative)에 피지배자 측의 대항적인 이야기(Counter narrative)를 대치하는 것이 미래 인류의 ‘새로운 보편성’을 구축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한”(52쪽)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 사회의 무수한 지방시 중 하나일 뿐”(지방시, 237쪽) 그와 나의 자리, ‘고난’을 겪고 있는 무수한 ‘나’들의 자리에서 행해질 말들로 엮이게 될 ‘대항 이야기’가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로컬데모>에서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이야기들은 발화되고 대답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러한 대항 이야기들이 ‘새로운 보편성’을 가지고 고립된 채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으려면, 각각의 이야기들이 자신의 고난을 바로 바라봄으로써 타자의 고난도 상상할 수 있는 태도와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 그러한 말들을 주고받는 가운데 “‘자신의 고난’을 철저하게 응시하는 것이 ‘타자의 고난’을 향한 상상으로 열릴 수 있는가”(『시의 힘』, 216쪽)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2015. 12. 18_중앙동 또따또가 갤러리 <시간강사라는 주변 : 곁과 편>(데모북+연속간담회)

 

 

 

 

 

ⓒYKS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가 먼저 돕는다

『출판, 노동, 목소리』(고아영 외 10인, 숨쉬는책공장, 2015)

김 대 성(<로컬데모>)

 

1. 허락 받지 않은 자리

언제나 그렇듯 책을 펼쳐 활자를 읽기 전에 날렵하고 매끄러운 책의 표면을 어루만져본다.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매만지는 감촉을 좋아했던 것은 책 그 자체를 내부 깊숙하게 감추어져 있는 비밀스러운 활자의 육체라고 여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그 탐닉이 더 강해졌다고 할 수 있으니 크게 틀린 짐작은 아닐 듯하다. 무표정하고 딱딱하면서도 한없이 관능적인 이 이중성이야말로 ‘책’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그 매력에 대한 탐닉이 책에 대한 페티쉬(fetishism)를 강화하고 때론 책을 신성화하기도 한다. 『출판, 노동, 목소리』(고아영 외 10인, 숨쉬는책공장, 2015) 또한 습관처럼 매만지다가 책에 대한 탐닉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를 억누르는 데 동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핏 디자인이 최소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밋밋한 책의 표지를 쓰다듬기만 했는데도 말이다.

이 책은 펼치기 전부터 이미 이야기를 시작 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책을 탐닉해온 오래된 습관 중의 하나인 표지를 어루만지는 행위를 향해 있었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의 표지엔 내부에 있어야 할 것이 바깥으로 나와 있고 굳이 기입하지 않아도 될 정보가 주인의 이름처럼 새겨져 있다. 대개는 책의 맨 뒷장에 정보 차원으로 기입되어 있는 발행인과 펴낸이, 펴낸곳, 동록번호 ISBN 등이 표지 ‘디자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요즘엔 웬만한 책엔 ‘삭제’되어 있는 디자인, 영업, 편집자의 이름뿐만 아니라 종이와 인쇄․재본에 관한 정보까지 표지 디자인에 동참하고 있다. 책의 맨 뒷자리에 있어야 할 이름이 책의 맨 앞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 조금은 어색한 그 자리바꿈이 책을 탐닉하던 내 손을 멈칫거리게 했다. 멈칫거림의 이유. 그건 책에 대한 관념과 태도만이 아니라 ‘책’이라는 간명한 이름 속에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기입되어 있는지, 아니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책’이라는 이름을 들어올리고 있었는지를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음을 인지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감춰야 하는 것이 드러나 있을 때 쉽게 공격 받는다. 그런데 ‘권리’ 또한 그렇게 허락 받지 않은 자리에 나왔을 때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말해왔던 ‘권리’가 실은 누군가에게 허락 받거나 승인 받은 뒤에만 이야기 되어 온 것은 아닐까. 허락 받지 않은 자리에서 권리를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인지 뒤늦게 체감하고 있는 시절. 감춰져 있어야 할 이름들이 바깥에 나와 있는 『출판, 노동, 목소리』의 표지 앞에서 자꾸만 멈칫거리게 되었던 이유가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2. 전류를 흐르게 하는 운동

11인의 출판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출판, 노동, 목소리』를 함께 읽는 이 자리를 준비하며 책의 표제이기도 한 ‘목소리’를 ‘수신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출판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이 책을 어떻게 수신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데모:북>의 작업이 어떤 목소리를 수신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나를 이끌기도 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귀를 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듣기란 건네는 이야기를 넘겨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야 한다. 그것은 들어(listen) 올리는(lift up) 일이다. ‘들어-올리기’를 통해 다른 곳으로 이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는 것, 그것이 수신(受信)의 숨은 뜻이라 생각한다. 목소리의 자리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수신할 수 없다. ‘갑’과 ‘을’의 자리를 일시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를 내어주는 일’을 통해서만 ‘목소리의 수신’이 가능하다. ‘자리 내어주기’는 몫을 재분배함으로써 박탈되었던 권리를 찾는 일이며 ‘목소리의 사각지대(死角地帶)’를 수신이 가능한 영토로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목소리에 자리를 내어주는 일, 목소리를 수신하는 일, 다시 말해 목소리를 들어-올릴 때 그것은 진동 한다. 다른 곳에 영향을 주는 파장이 되고 전류가 된다. 목소리를 전류로 흐르게 하는 일이 바로 수신 하는 일이다. 잠깐 전신주가 되어 그 목소리-전류를 흐르게 하여 다른 장소로 전하는 일. 그렇게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진동할 수 있게 이어주는 일은 <로컬데모>가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출판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수신하는 것이란 책과 관련된 수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들리지 않던 목소리)을 수행해온 이들이 교류할 수 있는 전선(電線)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중심에 놓아두거나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목소리가 흐를 수 있는 경로를 구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축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바닥 공사부터 시작해야 하는 지난한 건축적 과정과는 다르다.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거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동력을 생성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소리를 수신하는 것’만으로도 각자의 고유한 전류를 흐를 수 있게 한다. ‘수신하는 것’은 ‘자리를 내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것은 각자의 목소리가 흐를 수 있도록, 그 흐름을 지속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일이다. 목소리가 다른 곳에 닿을 때, 다른 것과 만날 때 그것은 전류가 된다. 동작을 멈추었던 장치가 가동하고 꺼졌던 등불이 다시 불을 밝힌다. 목소리를 수신하는 일이 발전기를 돌리는 운동과 다르지 않음을 새삼 새기게 된다.  

 

3. 빈곤한 목소리들의 교차

이 책을 읽으며 얼마간의 <로컬데모> 활동을 돌이켜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수사(修辭)’들을 빈번하게 만나게 된다. 모른 척 해야 할 것이 아니고 서둘러 버려야할 것도 아니지만 돌부리처럼 자꾸만 그 앞에서 멈춰 서게 되는 장애물과 같은 수사들. 그건 글로 많은 걸 표현해왔던 그간의 이력 속에 감춰져 있던 어떤 빈곤 혹은 편향됨과 마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역문화예술인들의 권리 수호를 위한 협의체. <로컬데모>라는 이름 앞에 내세워두었던 그 말과 자주 마주하게 된다. 문화예술인들의 ‘권리’란 무엇인가? 그 실체를 구체화할 수 있어야 협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야 협의(協議)가 허울뿐인 협의(狹義)가 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침해당하고 있는 권리를 지키고, 빼앗겼던 권리를 되찾는 일을 함께 하자고 요청할 때의 건넬 수 있는 말의 목록이 빈곤하다는 것을 매번 느낀다. 다급할수록 수사에 기대고 있음을 환하게 알게 된다. 그런 상태를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런 상태에서 시작해야 하고 요청해야 하고 타전해야 한다.

그래서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만 같다. 자주 무기력해지고 응답 없음을 원망하게 된다.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침탈당하고 있지만 결국 개인의 문제이거나 불행하고 안 된 일로만 여겨지고 있는 막연한 일들을 명징한 사태로 마주하자는 그 말건넴의 빈곤함이 가리키는 것은 말(수사)의 문제일까? 말의 전해지지 않음 속에서 나는 이곳의 감춰진 빈곤함을 생각하게 된다. 당사자가 아니면 말할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상태, 관계의 빈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누구와 함께 그 일을 해야 할지, 어디에 이런 사태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야할지 알 수 없는 환경의 빈곤. 오랜 시간동안 이러한 빈곤을 당연한 것이라 내면화해온 상태의 빈곤, 달리 말해 생태의 빈곤.

내 언어의 빈곤함과 반복적으로 마주하다보니 또 다른 빈곤과 만나게 된다. 나의 빈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처럼 또 다른 빈곤 또한 모른 척 할 수 없다. 빈곤한 그 상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빈곤한 말을 포기하지 않고 밑천으로 내어놓는 것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출판, 노동, 목소리』에서 내가 들었던 것처럼 목소리를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기꺼이 ‘고백’이라는 날 것의 목소리를 발신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목소리 하나를 여기에 옮겨둔다.  

“그러니까, 나는 고백하고 싶었다. 자판기 뒤에 사람이 있고, 책 뒤에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고.”

―정유민, 「자판기 뒤에 사람 있어요」, 132쪽. 

 

여기서 말하는 ‘고백’이란 솔직한 심정을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편집자적 자의식’을 내려놓은 ‘자기 목소리’를 가리키는 것에 가깝다. ‘책’이라는 ‘숭고한 대상’을 만드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감추고 지움으로써만 책을 더욱 신비롭고 가치 있게 만드는 이가 아닌 바로 그 책을 만들고 있는 ‘노동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뜻이리라. 정치적으로 올바른 ‘책이라는 상품’을 만들어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는 그 행위 자체가 가치 있음을, 그것이 ‘노동’이라는 낮은 자리의 말임을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올바름이라는 가치는 ‘책’에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만드는 일련의 공정, 다시 말해 책을 둘러싸고 있는 ‘생태’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빈곤하고 미약한 목소리들이 책의 생태를 지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책 만드는 사람의 자의식에 빠져 눈을 질끈 감고 그것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애써 외면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건 마냥 사치스러운 일”(130쪽)이었음을 고백하는 일은 자신이 책 뒤에 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목소리를 발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출판노동자들이 ‘편집자적 자의식’을 내려놓고 그동안 방치했던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접하며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집자적 자의식을 내려놓았다는 것은 책이라는 숭고한 대상을 만드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가치 있는 노동으로 책이라는 공유재를 만드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재명명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각자의 직무적 사명감을 서둘러 내려놓는 것이 능사는 아닐 테지만 그 사명감이라는 게 근본적인 무언가를 가리고 있었다면 뒤늦게라도 마주하고 또 응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문해본다. 내게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란 무엇일까. 그건 ‘응답의 의무’ 같은 게 아니었을까. 혹은 ‘응답으로서의 말하기’에 맹목적이었던 것이 아닐까. 모든 요청에 대해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의식이 얼핏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과잉을 낳은 것은 아닌지 홀로 되묻게 되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무기력’의 정체 또한 어쩌면 나조차 모르는 사이에 과잉되어버린 자의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란 바꿔 말하면 ‘원고를 청탁 받는 사람’일텐데 그건 결국 어떤 조직과 체제로부터의 호출에 응답하는 일이다. 그러니 글을 쓰는 사람의 ‘무기력’은 ‘응답(능력)의 빈곤’으로부터 연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디로부터도 호명되지 않는 조건이나 누군가로부터의 호명을 기다려야만 응답할 수 있는 수동성에 있기도 할 것이다. 거듭 자문하게 된다. 그간 애써 써왔던 글들이 어디로부터, 누구로부터의 응답이었는가.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 때문에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또 무엇을 묵살했고 무엇을 외면했던 것일가. <로컬데모>라는 ‘지는 싸움’을 하며 글쓰기를 통해 행했던 그간의 싸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응답과 묵살, 회피와 소문, 비아냥과 힐난이 번성하는 지역이라는 현장에서 더욱 명징해지는 것은 ‘패배의 감각’이다. 그런데 묵살이 명징해질수록, 소문이 번성할수록, 비아냥과 힐난이 거셀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싸워야할 대상이 추상화된 개념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구체적이고 명징한 실체라는 것. 그보다 더 힘써야 할 것이 <로컬데모>가 만나 할 이들이라는 것. 곳곳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하고 있는 구조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의 장소를, 오늘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무릅쓰고 말해본다면 패배가 재산이 되고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패배가 작은 매듭이 되고 또 매개가 될 수 있다면, ‘글 쓰는 사람의 자의식’을 서둘러 철회할 것이 아니라 ‘응답의 의무’의 자리에 ‘지는 싸움을 거듭 행하는 것’이라는 패배의 이력을 덧대어 새겨두고 싶다.

출판노동자(들)의 말을 이어 받아 계속 이야기해보자. 그들(만)의 말이 아니라 이곳으로 도착하고 있는 말이며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는 말로 전유하며 인용해둔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출판이란 무엇인지 늬들이 알랑가 모르겠지만 내 말을 잘 들어’ 화법에 익숙한 세대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곁에 있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131쪽) 이 낮은 목소리를 따라 다른 목소리가 흘러든다. “우리는 서로를 확인했다.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우리들’의 존재를.”(132쪽) 

 

4.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

『출판, 노동, 목소리』를 읽으면서 잊고 있던 한 권의 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프로파간다에서 펴내고 있는 ≪GRAPHIC≫ #28 BOOK DESIGN ISSUE VOL.2(2014). 책 디자이너들의 인터뷰와 디자인 화보가 실려 있는 이 독립잡지를 작년 이맘때쯤 독립출판디자인그룹 ‘그린그림’의 박성진 씨로부터 선물 받았었다. 『출판, 노동, 목소리』와 달리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북디자이너들의 글엔 ‘노동’에 관한 내용은 전무하다. 그 이유를 각자가 놓여 있는 위치(처지)의 다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그건 분명 ‘부재’ 하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기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맵시 있고 매끄러운 책의 디자인에 관한 곳에 ‘노동’이 들어가는 게 어색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출판, 노동, 목소리』엔 자신의 작업물에 대한 가치와 성취, 그리고 미학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 또한 부재의 자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 두 권의 책에서 내고 있는 목소리는 서로를 향해 부재의 자리를 가리키는 좌표로 삼을 수 있다. ≪GRAPHIC≫에 부재하는 ‘노동’과 『출판, 노동, 목소리』에 부재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서로의 목소리를 겹치게 할 때 그 부재의 자리가 분명해진다.

부재의 원인은 ‘결락’이나 ‘부족함’이 아니라 어떤 목소리의 진입을 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트’의 존재다. 『출판, 노동, 목소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디테일하고 미적인 부분에 관한 목소리까지 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나는 이 두 책이 서로를 교차하며 드러내고 있는 ‘부재의 자리’가 바로 이곳의 출판 생태를 가리키는 표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교차하는 일, 매개하는 일의 가장 중요한 점이 ‘체력’임을 알게 된다. 「체력론: 글, 체력, 출판에 대한 소고」(김신식)에서 내가 읽게 되는 것은 한 편집자의 사적인 회고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편집자가 될 수 있어야 함에 대한 역설이다. 필자의 원고에 대해 의견을 요청하는 것처럼 시스템의 개고(改稿)를 부단히 요청할 수 있는 체력이 있어야 한다. 필자의 글을 빌려 의견을 전하는 ‘2차 진술자’처럼 감춰진 문제를 드러내고 억압되었던 목소리가 뻗어나갈 수 있게 매개하고 교차할 수 있어야 한다. 매개와 교차는 기술이 아니라 노동이다. 무기력해지지 않는 체력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러니 ‘부재하다’는 빈곤의 표지는 매번 어떤 깃발을 흔들며 이곳으로 보내는 신호다. 그 부재의 신호를 누가 발견하고 또 누가 응답할 수 있는가. 지금 목소리를 발신하고 있는 사람, 누군가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먼저 들을 수 있다.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가 결국 누군가를 먼저 돕는다.

 

 

<데모:북> 2회_문화매개공간 <쌈>_2015. 10. 30

 

 

 

 

파업학교, 해고학교

이창근 이창근의 해고일기 오월의 봄, 2015

 

 

김만석(로컬데모)

 

1.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내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현장을 걷고 쓴 기록이면서 현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량의 지혜를 기록한 보고이자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의 종류가 다양해졌다고는 하지만, 노동자들의 권리 요구와 항의를 담담하게 기록하고 그것을 나누어 읽을 수 있는 저작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책은 투쟁지침서이자 파업지침서이고 해고 대응지침서라는 점에서 굳이 평가를 내리기보다 무엇을 더 정교화할 수 있을 것인지를 파악하는 게 중한 일로 여겨진다. 달리 말해, 어떤 싸움이 미래와 방향이 가늠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리고 싸움을 멈출 수 없고, 멈추어서도 안 될 때, 이 책은 패배를 예감하고 쓰러진다고 해도, 다리 무릎에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희망적 저작이면서 패배로 좌절하거나 무력하게 싸움의 대상에 대해 돌아서지 않도록 만드는 강력한 바탕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에 온통 무기력과 패배와 죽음이 넘실거리고 있음에도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들의 흐름을 과잉되게 정서로 고착화하지 않고 거의 초인적인 지구력을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이 책의 어느 페이지에서도 읽는 바로 그 순간에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을 단순한 희망적 교과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교과서가 어떤 사안에 대한 인과적인 설명에서부터 그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해석 그리고 규범적이고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여러 메커니즘을 하나씩 알려주는 것이라면, 이 책은 노동자들이 처하게 된 재난과 그것에 맞서 싸우는 일련의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아주 다양한 정서적 결의 흐름에서 신체의 문제, 관계의 문제까지를 조목조목 기록해 놓고 있어 그것을 만나는 것은 독자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든다. 달리 말해, 노동자의 삶에 재난이 닥친다는 것은 단순히 위기가 찾아왔다는 말이 아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도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근거 없는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해고에 맞서는 일은 생계의 가능성을 의문에 붙이는 일이 될 뿐더러, 기왕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살에 이르는 길까지 말이다.

실은 그런 일련의 과정들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인 해고에 대응하고자 할 때마다 무지막지하게 전개되는 폭력의 발생을 저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난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도입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 노출된다는 것을 이 책만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사측에서 고용한 용역에서부터 지배적 미디어의 침묵과 묵살은 기본이거니와 노동자 내의 분열을 책동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폭력들이 만연하고 이를 미래 세대라고 일컫는 아이들에게까지 노출시켜야만 한다. 그러니 해고는 단순히 직장에서 일자리를 잃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그 노동자가 소속된 공동체 자체에 대한 파괴에까지 이르게 된다. 해고 노동자들의 심리치료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폭력이 미치고 난 뒤에 이를 극복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이를 넘어서는 것은 도무지 가능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기 마련이다. 누가 파업에 선뜻 나설 수 있으며 해고에 맞서 투쟁에 이를 수 있는가.

 

2. 그렇지만 책은 희망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좌절하지 않는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되지 않는 국면이 있기 마련이다. 파업의 순간에도 해고의 순간에도 말이다. 매 순간마다 희망은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현장들로부터 비롯된다는 단순한 사실이 항상 나타난다.

 

쌍용차 파업으로 지역은 풍비박산이 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만의 기우였고 괜한 걱정이었다. 지역 노동자들은 건강했고 활기를 잃지 않았다. 움츠려 있는 우리에게 아침저녁으로 함께하는 열성을 보여줬다. 그 작고 소중한 연대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설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들의 노력은 지금까지 한결같이 이어지고 있다. 촘촘한 인간 관계망이 추락방지 그물이 되어 그나마 맨바닥과 거리를 만들어줬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이야말로 다시 일서설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돼 줬다.”(52)

 

무엇보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이런 주위의 도움을 통해 무릎을 다시 펼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쌍용차 투쟁을 통해 정리해고의 문제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고 나아가 언제든 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공공의 문제란 사실을 말해줄 때 우리는 힘이 났고 용기가 생겼다. 불안정한 고용판 위에 있는 우리들은 재수가 없거나 운이 나빠서라기보다 이 시스템이 운용되고 유지되는 한 언제든 갈라지고 벌어진 틈 사이로 추락할 수 있다. 이런 부분을 말해주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지치지 않게 만들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싸움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 질긴 싸움에서 가장 큰 우링릐 정당성이 훼손되지 않았다. 그것이 보존되고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앞으로 한발 더 나가게 만들었다.”(55)

 

실제로 지금까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쌍용차의 오너가 된 인도의 마힌드라 회장을 만나기 <희망 비행기>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모금을 통해 인도로 건너가 복직 요구를 직접하고자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쌍용차 사태는 회사의 재정 건정성과 아무 상관이 없었던 기획도산이라는 사실이 법적으로 밝혀졌고 이는 파업에서 해고에 이르는 순간까지 쌍용차 노동자들이 끝까지 주장했던 사실이었다. 지배적 미디어나 세간의 냉소들이 귀족노조를 부정하고 멸시하는 것으로 나아가며 갖은 수모를 겪었지만, 포기할 수 없는 객관적 근거를 이들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22명의 죽음은 투쟁의 기간이 지속되면서 저지하기 어려운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입은 트라우마는 여전히 완치되지 않고 치유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해고자는 많이 걷는다. 걸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이 길이 맞는지 묻고 또 묻는다. () 걷는 것에 충분히 집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걷는 이들의 몫이 아닌가. 쌍용차 노동자들은 여전히 걷고 있다. 방향을 그리기엔 걷는 것 자체가 너무 버겁다. 우선 우리는 최선을 다해 걷고 또 걸을 것이다. 이제 해결의 방법은 함께 찾아보자. 걷는 우리가 모든 걸 떠맡을 순 없지 않는가. 쌍용차 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생각하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65)

투쟁의 방식이 다만 분노와 증오로부터 되지 않고 사랑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즐겁게 투쟁하고 기쁘게 사랑하는 것. 몸을 가볍게 하는 것, 힘을 빼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이것이다. 살아남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그렇게 살아갈 때만이 인간의 존재는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풍부화된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죽음이 내게 준 지침이다.” (83) 동료의 죽음으로 향냄새가 익숙해지고 술에 항상 취해 있었음에도, 노동자들은 사랑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누군가의 죽음이 좌절과 허무로 이끌지 않고 더 많은 사랑과 기쁨으로 나아가도록 만든 지평이라고 알려준다.

 

3. 이른 바 노동자들의 글쓰기가 특별한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창근의 글쓰기는 파업과 해고투쟁이라는 노동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노동의 현실을 포착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 그것이 노동이라는 기왕의 규범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실감으로 드러내고 있어, 이전의 노동자 에세이와는 다른 지점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노동 활동 영역 내에서의 글쓰기보다 노동자들이 파업과 해고를 통해 스스로가 노동자 됨을 인지하는 과정이 훨씬 증대되고 있다면, 노동자 글쓰기의 미래는 파업과 해고투쟁의 과정에서 산출될 것이라는 묘한 생각을 갖게 만든다. 심지어 노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노동자로 보이지 않게끔 하고자 하는 태도가 없지 않다면, 파업과 해고투쟁의 순간에 노동자로서 세계에 대해 재성찰하는 표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파업과 해고투쟁은 언제나 노동자를 길러내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속시키는 권리를 발명하게 하는 학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이 파업에서 해고로 이어지면서, 학교의 범위는 공장에서 공장 바깥으로 점차 확대되었고 지역사회와 한국사회 전체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만 봐도 얼마나 영민하고 기민한 학교가 만들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공동체적 결속과 유대, 사랑과 우정의 가능성이 저 학교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핵심 과목이다. 물론 그 사이에 좌절이나 사회의 전반적인 냉대와 동료들 내부의 균열들을 모두 감내하는 과정들이 고통으로 엄습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우정과 사랑에 대한 호소는 늘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먼저 가닿는 법이지 않던가. 우리가 늘 손을 건네는 것은 강자나 부자가 아니라 빈자들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빈자들이 손과 고개, 마음을 서로 건네고 동료가 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이유 역시 무수히 많을 것이다. 무수한 그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손을 잡지 않은 사람들은 강자가 되거나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빈자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더 많은 빈자들이 학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책에 나와 있듯이 희망버스와 같은 기획일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이 마음의 끈을 이을 수 있도록 하는 촛불집회와 같은 방식이나 열린 추모제의 형식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발명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발명해야 하는 것도 빈자들의 몫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래서 모든 빈자들의 삶은 쌍용자동차 사태와 연관되어 있고 한국의 곳곳에서 발생하는 갖은 투쟁은 빈자들의 공통 몸싸움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사실 아무도 그 몸싸움의 장소에서 퇴근한 사람은 없는지 모른다.

 

4. 한국사회의 다양한 사업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파업과 해고의 칼바람은 앞으로도 훨씬 가속화할 예정이다. 징계해고, 통상해고, 정리해고에 일반해고까지 가능하게 된 현재의 노동 조건은 사회 전체를 파업과 해고투쟁의 학교로 전환하도록 요구하는 것인지 모른다. 부문별 투쟁에 한정되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이어질 노동에 대한 멸시와 무시, 권리 박탈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노동이라고 여기지 않은 장으로까지 확장되도록 요청하고 있는 형편이다. 가령, 문화와 예술의 장에서 일어나는 갖은 권리 침해나 박탈 그에 따라 이루어지는 침묵이나 은폐, 해고의 경우도 이의 연장선상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아직은 문화인과 예술인들의 문제제기나 관련 직업군의 일부분에서만 자신들의 행위를 노동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창조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행위와 결과를 노동과 노동의 결과로 결코 볼 수 없다고 여기는 탓이다. 이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전개되어야 하겠지만, 문화, 예술이 제작되는 과정과 이를 둘러싼 갖은 행위들에서 제대로 발화되지 않은 노동의 영역들이 잠복해 있다면, 이를 하나씩 검토하는 일이 문화예술인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전개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퇴근은 가능한 것일까?

다행인 자들의 잠재성

<데모:> 1(이창근, 이창근의 해고일기, 오월의 봄, 2015) 후기

김 대 성(로컬데모)

 


 

우리 모두는 싸움과 투쟁이 일상화 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모든 싸움과 투쟁은 규모와 대의를 통해 규정되곤 하지만 싸우고 있는 이들은 알고 있다. 규모와 대의보다 더 힘이 센 것이 있다는 것을. ‘현장말이다. 모든 싸움과 투쟁은 현장()이 증명한다. 그런 이유로 싸움과 투쟁을 하는 이유는 이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빼앗긴 현장을 탈환하고 지키는 것이 오늘날 모든 싸움과 투쟁의 첫 번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로컬데모> 또한 현장을 다시 찾아 지켜내고자 한다. 우리 주변의 싸움과 투쟁, 대의나 규모에 포착되지 않는 다양한 움직임들을 주목하고 불러내어 각자가 놓여 있는 현장()을 공유하는 자리가 필요하다. 개별화되고 차단되어 있는 각자의 현장을 만나고 감응하는 일부터가 어쩌면 싸움이고 투쟁인지도 모른다 

이창근의 해고일기(오월의 봄, 2015)를 읽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싸움과 투쟁의 현장에서 을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다급하고 절박한 현장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글을 쓰는 일. 그것은 무력감과 절망의 증표가 아니다. 싸움과 투쟁의 현장에서 쓴다는 것아직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창근에게 글은 대개 구조 요청의 의미로 씌어진다. 이 구조 요청은 위기 상황에 놓여 있는 이가 바깥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쓰는 구조 요청은 이곳이 위기 상황임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창근의 해고일기가 비슷한 말을 오랜 시간동안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은 지금-여기-우리의 위기를 지루한 반복쯤으로 여기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냉소와 환멸. 그것은 대체로 위기가 아닌 구조 요청을 향하기 마련이다. 그러는 편이 더 쉽고 간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말해야 한다. 반복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가 반복하고 있다고 심드렁하게 말해버리는 우리라는 것을 

냉소와 환멸의 반복을 뚫어내며 이창근은 말한다.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지역과 내 삶에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야”(112) 한다고. ‘토대를 바꾸고 기반공사를 다시 하는 일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 목소리를 구조 요청의 반복 속에서 길어올린 사유라고 해도 좋다. 싸움과 투쟁의 현장이 노동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다. 노동자에게 글을 쓰는 일이란 하지 않던 일을 갑작스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기어코 알아내어 하는 일이다. 투쟁과 싸움 또한 그런 일일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의 사실을 배우게 된다. 투쟁과 싸움 또한 그런 일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일을 기어코 알아내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공부와 투쟁을 병행하는 노동자’, 그런 노동자가 기어코 말한다. “투쟁하는 노동자는 자본의 치부와 비밀을 가장 많이 아는 학자이며, 니체의 말처럼 철학은 망치로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철학자다.”(114)

  노동자는 위기의 시대, 더 정확하게 말해 구조 조정의 시대를 살아가는 잠재적인 학자이자 철학자다. 시스템이 허용하지 않은 싸움과 투쟁을 할 때 그 잠재성이 드러난다. 힘겹게 증명된 이 진실 앞에서 질문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 예술가의 잠재성이란 무엇인가? 오늘, 시민의 잠재성이란 무엇인가? 잠재성이라는 공통성을 탐색하기 위해 다시 고쳐 물어야 한다. 지금-여기-우리의 싸움과 투쟁은 어떤 모습인가? 구조 조정의 시대에 저항하는 싸움과 투쟁의 현장 속에 각자의 잠재성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의 공통 싸움과 투쟁은 각자의 잠재성을 만나게 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창근은 20096월 공장 점거 투쟁 중 누군가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자동차를 만들어보면 어떨까?”(119) 파업 공장 안에서 노동자가 자동차를 만드는 일을 이창근은 꿈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저 너머에 있는 요원한 일이 아니라 코앞에 있는 잠재성이기도 하다. 기타를 만들던 해고 노동자들이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으로 활동하는 사례를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이 결성한 밴드 콜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페이지의 한 귀퉁이에 나는 이런 메모를 남겨두었다. ‘지역문화예술인들의 권리 수호를 위한 협의체 구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로컬데모>는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의 잠재성을 깨우고 실현할 것인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글로써 기록하면서 더 단단해지고 강해진다. 그 힘이 이곳을 조금 더 넓은 곳으로 만든다. 넓다는 것이 규모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하는 일, 보이지 않던 길을 내는 일을 통해서만 없던 영토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누가 그 일을 하고 있는가. 이창근은 해고자의 나이테에서 그 흔적을 찾는다. “생장 조건과 변화를 나무 스스로 기록하는 나이테는 기후조건이나 환경 변화, 특정한 사건의 압축 기록물이자 블랙박스이다.”(214) 해고자의 나이테엔 오욕의 역사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둥글 어깨 겯고 걸어가는 동심원의 나이테”(215)에 씌어져 있는 기록을 읽어야 하는 이는 우리다. 오늘의 우리는 (해고) 노동자들의 언어를 빌려 쓰고 있다. 억압 받고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 기대어 침몰한 세계에서 겨우 균형을 잡고 있다. 그러니 그 힘에 기대어만 있을 것이 아니라 그 힘을 밑천으로 기울어진 이 세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힘의 잠재성, 연대의 힘으로 말이다.

  끝없이 침몰하는 세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순 구분법은 무용해진지 오래다. 살아남은 우리는 잠정적 피해자인가, 아직 순번이 돌아오지 않은 피해 대기자인가? 피해자와 다행인 자가 있다. 우리는 아직 다행인 자다. 다행인 자의 유일한 동료는 피해자다. 마찬가지로 피해자의 유일한 동료 또한 다행인 자이다. ‘-관계라는 도식에서 민주주의는 요원해보인다. ‘은 점점 더 막강해지고 그만큼 염치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갑을 향해 잘못에 대한 인정과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갑이 바뀌지 않는다면 을이 바뀌어야 한다. 을들의 변화를 통해 -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파쇄해야 한다. ‘을들의 민주주의를 발명해야 한다. ‘-을 사이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을들 사이의 민주주의도 필요하다. ‘을들 사이의 민주주의란 연대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연대란 엇갈림과 뒤엉킴, 무수한 갈등의 긴장을 벼텨내는 끈을 아귀힘으로 붙들고 있을 때만 지킬 수 있다. “노동자 사이를 갈라놓은 건 자본이지만 그 틈을 메우고 살아가는 건 우리들의 의지다.”(368)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만남을 주저하지 않는 것, 앞질러 절망하거나 피로해지지 않는 것, ‘을들의 민주주의는 그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곁에서 함께 목소리를 내며 걷는 일

-<데모:북 demo:book> 1회 현장의 목소리 

최 은 순(소설가)

    1.

 

2015년 9월 22일 화요일, 오후 4시. 중앙동 또따또가 갤러리에서 <로컬데모>가 진행하는 <데모:북 demo:book> 제1회가 열렸다. 서평강좌 형식의 <데모:북 demo:book>은 지난 8월 6일에 있었던 ‘인적 재개발에 저항하는 지역문화예술인들의 연속간담회(1)’와 같은 선상에 있다. ‘<신생> 사태로’부터 촉발된, 두 편집위원의 권리박탈의 문제를 지역 문단 전반에 만연한 문화예술인들의 열악한 환경의 문제로, 나아가 전체 사회의 문제로 확대해서 사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그들이 경험하고 문제의식을 느낀 것들을 공유하여 온당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안을 고안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선정된 책은 이창근의 『이창근의 해고일기』(오월의 봄, 2015년 2월)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쌍용자동차 투쟁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글이고 크고 작은 매체에 실렸다. <데모:북 demo:book>을 시작하면서 김대성 선생님은 책을 읽으면서 ‘대의’로 무장된 거대한 싸움이 아닌 현장성을 바탕으로 한 싸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커다란 명분이나 규모에 포착되지 않는 다양한 움직임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가 됐으면 하는 바람도 함께 얘기했다. 곧이어 김만석 선생님의 서평강좌가 진행됐다. 강좌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책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 서두에 해당하는 부분과 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노동자 글쓰기의 유형, 그리고 이창근의 『해고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노동자 글쓰기의 독특한 형태에 관한 것.

서두부분에서 김만석 선생은 최근 들어 크게 부각되고 있는 쟁점 두 가지, 난민과 디아스포라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나는 시리아 난민과 관련된 것인데 지중해를 건너 유럽 망명을 떠났다가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 꼬마의 시신, 또 하나는 청년실업 해결과 정년보장을 앞세운 임금피크제. 서로 달리 보이는 이 두 사태를 김만석 선생은 재난으로 보았다. 국내의 무력분쟁과 내전으로 4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난민이 되고, 국경을 넘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과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고 그 돈으로 청년들의 일자리를 마련, 일반해고제도를 도입하여 상대평가로 점수를 매겨 쉽게 노동자를 해고하도록 하는 것 모두 삶의 터전에서, 생계를 위한 일터에서 어떤 동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내몬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정이나 보장된 미래는커녕 생계조차 이어갈 수 없도록 하는 노동현실과 함께 김만석 선생은 자율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삶과 노동이 분할되지 않는 형국’에 대한 설명도 이어갔다. 삶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터에 가서 일을 하는 것, 삶과 노동하는 자리가 구분되던 것과 다르게 현재의 사회는 사회 전체가 하나의 공장이라는 것이다. 일하는 현장에서의 노동이 그 바깥에 존재하던 삶의 영역으로 확대된 것, 아예 삶 자체가 노동하는 현장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 자체가 자본이 되고, 기업의 것으로 환수되는 것. 이에 대한 예로 김만석 선생은 유튜브를 들었다. 애초에 유튜브는 전세계인들이 손수 제작한 동영상을 올려 자유롭게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서비스가 시작되고 몇 년이 지나 전세계 유저들에 의해 활성화된 이 공간은 구글에 매각됐다. 이제는 없다는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 카카오톡처럼 일상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재미나 놀이로, 때로는 대화의 창구로 콘텐츠를 이용하는 행위자체가 돈이 되고 기업의 배를 불리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활성화 되고 있는 카카오택시에 관한 것을 라디오에서 들은 적이 있다. 일반시민들에게 무료로 제공되고 있는 서비스인데 이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카카오톡을 이용해서 택시를 타는 사람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대한 정보를 통해 상권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술의 증진으로 생활이 편리해진다는 것만 보일 뿐 그 이면의 존재하는 자본의 움직임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과의 만남, 대화, 교감을 나누는 것은 자본이 주도한 기술산업인 미디어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이루질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모든 장치들이 사라진다면, 잠시라도 멈춰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짧은 시간 동안 정전이 되는 순간을 생각해본다면, 암흑 전치의 세상에서 부지불식간에 엄습해오는 공포는 생활의 불편함을 훨씬 능가하는 차원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김만석 선생은 이창근의 『해고일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 도처에 만연돼 있고 실질적으로 겪고 있을 지도 모를 재난의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쌍용자동차의 사태는 그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이라고 하는 사적영역에까지 침투한 자본, 공장에서의 착취가 일상의 영역까지 침투한 재난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하며 아울러 국가와 사회가 부과한 재난을 실감의 영역으로 인지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감정적 기복이 감지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읽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김만석 선생은 말했다. 그러나 책의 저자인 이창근 씨가 그랬듯 좀 더 객관적인 층위에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했다. 『해고일기』는 노동자 글쓰기의 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에 앞서 김만석 선생은 1970년대부터 시작된 노동자 글쓰기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했다. 1970년대 박정희 체제는 노동자에 대한 유화적 정책을 철회하고 본격적으로 반공을 내세운 억압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입과 목을 조이기 시작하는데,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문자언어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때 글의 형식은 새로운 형식이 아니라 기존의 형식을 빌려와 이야기한다. 대표적으로 일기 형식, 연대기적 서설, 이미 있는 노래에 자신의 삶을 내용으로 한 가사로 바꾸는 것. 이것은 80년대까지 이루어지는데 이에 대한 가치판단은 사람마다 다르다. 김만석 선생이 보기에 이러한 방식은 굉장히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글쓰기지만 이와 반대로 자신의 형식이 부재하다는 비판이 대부분이다. 90년대부터는 미디어의 급격한 성장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담을 수 있게 됐다. 사진, 디지털미디어, 르포르타주의 전업작가 증가. 2000년대부터는 창조적인 형태로 노동자 글쓰기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김진숙 씨의 『소금꽃 나무』를 들 수 있으며, 이창근 씨의 글쓰기를 새로운 노동자 글쓰기의 형태를 완성하는 한 사례로 보았다.

『이창근의 해고일기』가 가진 특성은 단순한 일기형식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이창근의 해고일기』는 신문에 연재된 칼럼들을 나누어서 배치한 책이다. 이 책은 노동자 글쓰기 가운데 독특한 형태를 몇 가지 지니고 있다. 첫 번째로 ‘걷기와 글쓰기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 이것은 김만석 선생 자신도 놀랍고 동시에 감동적이라 생각한 부분이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책임지면서 글쓰기를 수행한다는 것은 대단한 공력이 필요한 일이며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것을 늘 견지하고 있는 자세가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두 번째로 『해고일기』는 내용상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반부는 쌍용자동차의 문제, 후반부는 재난, 즉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 전자는 전쟁담론으로 후자는 재난담론으로 읽힌다. 쌍용사태는 일종의 ‘기획된 부도’이며 동시에 국내정치의 산물, 그래서 공장 안에서의 노동자의 행태를 전쟁이라는 상황에 빗대어 서술했다는 것이다. 이때 싸움은 사측과 노동자의 대결이며 쌍용차의 문제는 노동자만의 문제로 인식되기 쉽다. 후반부의 쌍용사태는 일종의 재난의 문제로 전환해서 서술되고 있다. 파업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없고 해고자복직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서술한다. 이때 복직투쟁을 전개하는 방식은 전쟁이 아니라 재난으로 사회화해서 논의하고 있다는 것인데 재난은 그것이 발생하는 순간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된다. 해고의 문제 역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재난과 같은 것이다. 재난을 이야기할 때 나올 수 있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첫째는 절대적 곤경에 대한 것이다. 관습, 제도, 노동력 등 모든 것이 사라지는 형태 말이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기회의 순간에 대한 가능성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곤경이 발생할 때 곧바로 희망으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극도의 폭력이 제기되기도 한다. 차별이 대표적으로 발생하는 폭력을 말한다. 그래서 이창근의 『해고일기』가 후반부를 재난의 형식으로 서술된 것은 탁월해보이지만 희망에 대한 과잉된 형태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을 김만석 선생은 우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근 씨의 훌륭한 점은 모든 글의 마지막에 희망을 타진하기 위한 문장으로 마무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 이것은 단 한 번도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의미다. 적대시하는 세력과 언제나 맞서 버틴다. 그런데 이 버티는 동력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고 김만석 선생은 말한다. 이창근 씨는 쌍용차해고의 문제, 파업을 하고 복직투쟁을 벌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법적으로 밝혀지기를 원하는 사안은 언제나 법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료들이 있었다. 전반부의 동료는 노동자들, 후반부의 동료는 대한문 앞에 모셔놓은 쌍차 노동자 영정에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동시에 늘상 해왔던 자기비판. 남의 도움 없이도 일을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이창근 씨는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끝까지 싸우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동료라는 측면에서 김만석 선생은 문화예술 행위가 노동행위와 같은 것이라면 문화예술인들이 『해고일기』의 키워드와 도구상자를 발굴해야 한다고 보았다. 노동자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사회적인 문제에 이의를 제기했을 대 발생하는 관계의 단절. ‘면도칼로 관계를 도려내는 것’ 친한 동료와의 결별과 같은 문제가 가장 힘들다. 기업, 사회, 미디어가 조장하기도 하기 때문. 그런 점에서 『해고일기』는 중요하다고 보았다. 

막으로 김만석 선생은 이창근의 『해고일기』를 왜 우리가 서로 나누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로컬데모>의 문제를 설명해주는 키워드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문제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생은 자신이 현재 앉아 있는 자리에 객석에 모인 사람들 역시 앉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성 선생은 우리 모두가 구조조정 대상이지 않나, 어제까지 다녔던 직장을 오늘 아침에 해고통보 받는 세상이지 않나. 그래서 무력한 구조조정 대기자가 아니라 구조조정이라는 이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해고일기』는 그들만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것을 일종의 구조요청이라면 국가와 교과부 등은 못 듣겠지만 과연 우리는 들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가. 응답할 수 있는 말을 찾는 것이 이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2. 

잠깐의 휴식시간을 보내고 2부가 이어졌다. 1부와는 달리 2부에서는 자리 배치를 달리했다. 강의하는 자리와 객석의 구분 없이 의자를 동그랗게 배치해서 둥글게 모여 앉았다. 2부의 시작은 왜 이 자리에 오게 됐는지를 각자가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별한 목적 없이 참석했다는 이지은 씨는 오늘 강좌를 들으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게 됐고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지은 씨와 함께 온 권종민 씨는 평소에 재난에 대해서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과 관련해 참여는 간혹 했었고 강좌를 듣고 싶은 마음에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간담회와 평가회에 참석했었고 이번 모임이 세 번째 자리인 송진희 씨는 <로컬데모>가 협의체를 구성하기 위해 하고 있는 고민들이 자신이 속해있는 현장에서의 문제나 고민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 참여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오게 되었다고 했다.

김만석 선생은 첫 번째 간담회 할 때는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고 했다. 자신이 현재 당면한 문제를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말하는 방식을 고안해야 하는 것, 자신이 편한 대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형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버벅대고 말하다 중단하기 등.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이 그 사이에 말을 끼어넣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오늘의 이 자리에 와서도 자신이 겪은 문제는 말하기가 또 힘들고 그래서 말하기 방식, 다시 말하기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새로운 말의 방식을 고안해서 블로그에 업로드 할 것이고,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페이스북에서 알게 됐다는 박상현 씨 대학원생이며 노동당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쌍용차 문제가 내 문제라는 것이 와 닿는다고도 했다. 최근 진행됐던 노동개혁에 관해서는 회사에 취직한다면, 일을 잘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잘려나가는 환경에 놓일 것 같다고 했다. 김상미 씨는 제 위치에 대한 생각과 함께 위기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서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아직 정리가 안 돼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라고도 했다.

김대성 선생은 『이창근의 해고일기』는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이, 이 책을 읽다보면 누구라도 ‘자본에 이기지 못할 것 같은데 왜 계속 싸울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재능교육도 해고자들의 소송이 2600여 일이라는 시간을 견디고서야 겨우 법원으로부터 부당해고임을 승인 받을 수 있었고 KTX 여승무원들은 결국 패소했다. 자살자가 계속되고 있는 데도 계속되는 싸움. <로컬데모> 또한 뚜렷한 성과가 없는 방식으로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고 했다. 간담회 때 성과가 있었음에도 이후에 굉장히 무력한 상태에 한동안 놓여있었는데, 개인의 무력함도 있겠지만 계속해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욕, 그래서 그냥 무기력 상태로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겪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린다면 다음 세대에도 그대로 이양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적인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문화예술인이 겪는 권리와 권한박탈, 폭력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논의할 수 있는 협의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굳혔다는 것이다. 마땅히 그 기능을 담당해야 할 공적기구들은 침묵하고 있으니 새로운 기구를 발명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계속해서 만날 수 있는 작업을 지속하는 것이 우리가 싸우는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며 간담회나 <데모:북 demo:book>을 통해서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만석 선생은 공적기구의 침묵이 어떻게 보면 거대한 공모의 상태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다. 『해고일기』에는 공장에만 돌아가면 되는가,라는 질문에 이창근은 아니다, 복직하는 것과 동시에 지역과 사회에 새로운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은 지금 정리해고 중이고 부당한 해고를 하고 있다. 쌍용, 한진, 콜텍, 기룡, 현대자동차 하청업체, 마트들을 모두 순회하는 것은 쌍차 해결만이 다가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투쟁학교, 시위학교, 해고학교, <로컬데모>는 일종에 시위를 배울 수 있게 되는 것,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관계형식으로 전환하는 것, 동료를 만나는 새로운 인식들을 제공해준다. 뒤늦게 이경미 씨 참석 했다.

김대성 선생은 『해고일기』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는 자본의 비밀을 가장 많이 학자이면서 철학자’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문제제기하고 싸우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들, 그렇게 알아버렸기에 투쟁을 중단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생사태, 작가회의 묵살, 지역신문의 침묵 등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중단할 수 없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학자, 철학자라는 말은 잠재적인 능력을 담보하는 말이고 노동자를 새로운 주체로 부각시키는 말인데 그렇다면 오늘날 예술가들의 잠재성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해고일기』에서 76일 파업이 진행될 때 어떤 노동자가 ‘우리끼리라도 자동차 만들자’ 했다고 한다. 오늘날 자동차 회사에 다닌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콜드콜텍 해고 노동자들은 밴드를 만들어 시위 현장을 찾아가며 정기적으로 공연을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희망이나 꿈을 계획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품게 된다고 했다. 김만석 선생은 『해고일기』의 222쪽을 인용하며 쌍용자동차 사태를 미스터리와 스릴러라는 영화 장르로 비교한 이창근의 창의적이면서도 탁월한 분석적 시선에 감탄했다고 한다. 김대성 선생은 『해고일기』에서 이창근 씨가 쓰는 인용이나 비유들을 보면서 그가 훌륭하다,라고 느낀 게, 그것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발명한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이 다르니, 그들에게 맞는 언어를 찾아서 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언론사 보도협조문을 작성하는 사람이다 보니 체계적인 글쓰기는 물론이고 현장에서 계속해서 생각하고 발명해낸 결과물이 그의 글쓰기라는 것인데 김만석 선생은 그것을 도구상자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삶 자체가 도구상자를 구비해놓고 있는 사람, 언제 어디서나 도구를 사용해서 그 현장에 맞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 말이다. 비록 『해고일기』가 이창근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5년 동안 현장에서 만났던 희망의 가능성, 동료를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한 시간들을 담고 있다. 권종민 씨 세월호 시위에 참여했었는데 세 번째로 시위하는 현장에 갔을 때에 진심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한두 번 갔을 때는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세 번째 갔을 때 곤봉을 든 경찰들이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무력을 행사하려 할 때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그러지 말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생각이 바뀌게 됐다고 한다. 송진희 씨 <살림>의 간담회 이후에 생각했던 것을 전해주었다. 함께 살아가는 감각이라는 것이 생각보다는 힘들고 끊임없이 발명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을 모으고 각자의 삶에서 마련된 자리로 오게 하는 것이 어렵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송진희 씨는 서평강좌를 들으면서 길어올릴 수 있는 말이 있었는데, 바로 현장이라는 말이라고 했다. 현장이야말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감각할 수 있는 말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더 많은 현장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로컬데모> 역시 더 많은 현장과 접속하는 게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가진 잠재성이란 자기가 있는 자리를 먼저 인식하는 것이고 모인 사람들의 각자의 현장을 만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에 관한 이야기. 걷기와 글쓰기가 결합된 것과 관련해 <로컬데모>의 몸이란 어떤 걸까 생각해보게 됐다는 것이다. 지은 씨 본인은 부조리한 상황에 닥치면 대체로 순응하는 편이지만 이창근 씨는 계속해서 그 이유를 찾는 모습을 보며 나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이창근 씨가 알아버린 것들에 대해서 나의 경우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말을 좀 더 고민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됐는 것이다. 김대성 선생은 녹색당의 경우, 사소해보이는 일에도 성명서를 계속해서 발표하는 일을 언급하며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대단한 일인 것 같다고 했다. 당의 대의를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에서 함께 목소리를 내는 차원으로서의 성명서이기 때문이다. <로컬데모>도 그처럼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경미 씨 동료가 있지만 나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한 나머지 옆의 동료의 목소리를 듣게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 어떤 사건과 안타까운 일에 대해서 단순히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같이 공감하려는 모습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다고 했다.  

『이창근의 해고일기』와 함께 한 서평강좌의 마무리 시간. 김만석 선생은 다음에도 함께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로컬데모>에 건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자리의 이야기를 후기로 작성해 보는 등 나름의 도구상자를 가지고 있다면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고, 직접 참여, 직접 만나 대화해서 같이 걸어갈 수 있는 방편들을 함께 고안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고도 했다. 그것이 이창근 씨가 말한, 스스로의 삶을, 서로의 삶을 지탱시킬 수 있는 힘이지 않나 생각해본다고 했다. 해야 할 일은 많지만 하고 있는 일은 많지 않은 것 같고 당사자, 함께 모일 수 있는 의제가 있어야 하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고 했다. 멈춰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서 <데모:북 demo:book>이 만들어졌는데, 앞으로도 서로와의 간극을 매우기 위한 노력들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데모:북 demo:book>(2회)
- 함께 만날 책 : 고아영 외 10명, <<출판, 노동, 목소리>>, 숨쉬는책공장, 2015.
- 시간 : 2015년 10월 30일 금요일 오후 7시~9시
- 장소 : 수영 지하철 역사 내 문화매개공간 <쌈>
- 서평/강좌 진행 : 김대성(로컬데모, 문학평론가)...
- 참가비 : 5,000원(전액 <로컬데모> 운영비로 사용됩니다)
- 주최/주관 : <로컬데모>
- 문의 : loculdemo@gmail.com / 010-8502-구사육칠
https://www.facebook.com/loculdemo
http://loculdemo.tistory.com

 

<데모:북 demo:book> 2회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목소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스스로를 제외한 모든 노동을 이야기하지만, 스스로의 노동에는 입을 다물게” 되어버린 ‘출판 노동자’들의 다양한 자기 목소리를 진솔하게 담고 있는 <<출판, 노동, 목소리>>(고아영 외 10인, 숨쉬는책공장, 2015)를 함께 읽습니다. 지역에선 아직 ‘출판 노동’이라는 개념조차 정착되지 못한 형편이지만 그럼에도 이곳에서 매해 수백권이 넘는 책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그 책을 함께 만들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누구인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기억되기도 전에 잊혀진 이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고 있는 이들은 비단 출판 노동자들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지역의 수많은 문화 기획자들과 예술가들의 작업 또한 극소수만이 주목을 받을 뿐 대부분의 작업과 활동은 쉽게 지워집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출판 노동자들의 자기 목소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랜 시간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해오고 있지만 삭제되고 망실된 우리 주변의 노동자인 문화 ∙ 예술인들의 목소리 또한 환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데모:북> 2회는 수영 지하철 역사 내에 있는 문화매개공간 <쌈>에서 진행합니다. 지역의 출판 노동자들을 초대하여 현장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도 마련할 예정입니다. 책과 연결되어 있는 모든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모쪼록 자리하셔서 더 많은 목소리를 내어주셨으면 합니다. 더 많은 목소리를 발견하고 발명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데모:북 demo:book>(1회) 
- 함께 만날 책 : 이창근, <이창근의 해고 일기>, 오월의 봄, 2015 

- 시간 : 2015년 9월 22일 화요일 오후 7시~9시 
- 장소 : 중앙동 <또따또가 갤러리> 
- 서평/강좌 진행 : 김만석(로컬데모, 미술평론가) 
- 참가비 : 5, 000원(전액 <로컬데모> 운영비로 사용됩니다) 
- 주최/주관 : <로컬데모(facebook.com/loculdemo)>
- 문의 : loculdemo@gmail.com / 010-9610-일육이사 


시작하며

지역문화예술인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결성된 <로컬데모>에서 공개 서평 강좌 <데모:북demo:book>을 시작합니다. 현장과 현실에 접속할 수 있는 다종한 방법 중에 책을 경유해 한 자리에 모여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되찾아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데모:북demo:book>은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항의나 요청의 기록들을 함께 더듬어 보고 이를 우리의 책으로 다시 써 봄으로써 봉쇄되고 묵살된 막힌 회로를 열기 위해 고안된 서평강좌입니다. <데모:북demo:book>은 그런 점에서 ‘데모’에 관한 책을 함께 읽는 것이면서 또 다른 데모를 위한 책으로 전환 하는 방식을 고안하고자 합니다. 누군가의 싸움의 기록을 우리들의 싸움을 위한 도구상자로, 그 책의 쓸모를 재발명하고 공유하여 우리가 놓여 있는 현장과 현실에서 전개될지 모르는 부정성들과 단단하게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응집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Demo-Book>은 오늘의 현장과 현실의 무게를 정직하게 담고 있는 책을 함께 읽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Demo-Book>의 필요와 요구는 <로컬데모>가 문제의식으로 갖추고 있는 지역문화 장 내에서의 권리박탈(<신생사태>와 기능부전에 빠진 <부산작가회의>)의 경험을 단순히 특정한 지역이라는 한정된 시스템에서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조건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경험들과 문제의식들과 접속하여 확장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이러한 작고 소소하지만 생생한 만남을 통해서, 일상을 오염시키는 모욕과 혐오 그리고 굴종의 조건들을 당장 해결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응원하고 지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1회 이창근, <이창근의 해고일기(오월의 봄, 2015)>

1회에서는 쌍용 자동차 해고 노동자인 이창근의 장기 투쟁 일기를 묶은 이창근의 해고일기(오월의 봄, 2015)를 함께 읽습니다. 쌍용차 해고 사태에 관한 투쟁 기록이지만 긴 시간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 속에 한국 사회가 노정하고 있는 구조적 모순이 생생하게 담겨져 있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쌍용차 투쟁이 또 다른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과 이어져 있을 수밖에 없으며 밀양 송전탑이나 세월호라는 국가의 구조적 폭력의 문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지난한 투쟁의 기록을 통해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로컬데모> 구성원이자 미술평론가이기도 한 김만석 선생님의 강의 후에 지금-여기-우리의 문제 의식 아래에서 이 책에 개입해보는 공개 토론 시간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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