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학교, 해고학교
―이창근, 『이창근의 해고일기』, 오월의 봄, 2015
김만석(로컬데모)
1.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내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현장’을 걷고 쓴 기록이면서 현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량의 지혜를 기록한 보고이자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의 종류가 다양해졌다고는 하지만, 노동자들의 권리 요구와 항의를 담담하게 기록하고 그것을 나누어 읽을 수 있는 저작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책은 투쟁지침서이자 파업지침서이고 해고 대응지침서라는 점에서 굳이 ‘평가’를 내리기보다 무엇을 더 정교화할 수 있을 것인지를 파악하는 게 중한 일로 여겨진다. 달리 말해, 어떤 싸움이 미래와 방향이 가늠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리고 싸움을 멈출 수 없고, 멈추어서도 안 될 때, 이 책은 패배를 예감하고 쓰러진다고 해도, 다리 무릎에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희망적 저작이면서 패배로 좌절하거나 무력하게 싸움의 대상에 대해 돌아서지 않도록 만드는 강력한 바탕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에 온통 무기력과 패배와 죽음이 넘실거리고 있음에도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들의 흐름을 과잉되게 정서로 고착화하지 않고 거의 초인적인 지구력을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이 책의 어느 페이지에서도 읽는 바로 그 순간에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을 단순한 희망적 교과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교과서가 어떤 사안에 대한 인과적인 설명에서부터 그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해석 그리고 규범적이고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여러 메커니즘을 하나씩 알려주는 것이라면, 이 책은 노동자들이 처하게 된 재난과 그것에 맞서 싸우는 일련의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아주 다양한 정서적 결의 흐름에서 신체의 문제, 관계의 문제까지를 조목조목 기록해 놓고 있어 그것을 만나는 것은 독자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든다. 달리 말해, 노동자의 삶에 재난이 닥친다는 것은 단순히 위기가 찾아왔다는 말이 아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도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근거 없는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해고’에 맞서는 일은 생계의 가능성을 의문에 붙이는 일이 될 뿐더러, 기왕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살에 이르는 길까지 말이다.
실은 그런 일련의 과정들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인 해고에 대응하고자 할 때마다 무지막지하게 전개되는 폭력의 발생을 저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난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도입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 노출된다는 것을 이 책만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사측에서 고용한 용역에서부터 지배적 미디어의 침묵과 묵살은 기본이거니와 노동자 내의 분열을 책동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폭력들이 만연하고 이를 미래 세대라고 일컫는 아이들에게까지 노출시켜야만 한다. 그러니 ‘해고’는 단순히 직장에서 일자리를 잃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그 노동자가 소속된 공동체 자체에 대한 파괴에까지 이르게 된다. 해고 노동자들의 심리치료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폭력이 미치고 난 뒤에 이를 극복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이를 넘어서는 것은 도무지 가능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기 마련이다. 누가 파업에 선뜻 나설 수 있으며 해고에 맞서 투쟁에 이를 수 있는가.
2. 그렇지만 책은 희망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좌절하지 않는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되지 않는 국면이 있기 마련이다. 파업의 순간에도 해고의 순간에도 말이다. 매 순간마다 희망은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현장들로부터 비롯된다는 단순한 사실이 항상 나타난다.
“쌍용차 파업으로 지역은 풍비박산이 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만의 기우였고 괜한 걱정이었다. 지역 노동자들은 건강했고 활기를 잃지 않았다. 움츠려 있는 우리에게 아침저녁으로 함께하는 열성을 보여줬다. 그 작고 소중한 연대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설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들의 노력은 지금까지 한결같이 이어지고 있다. 촘촘한 인간 관계망이 추락방지 그물이 되어 그나마 맨바닥과 거리를 만들어줬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이야말로 다시 일서설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돼 줬다.”(52쪽)
무엇보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이런 주위의 도움을 통해 무릎을 다시 펼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쌍용차 투쟁을 통해 정리해고의 문제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고 나아가 언제든 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공공의 문제란 사실을 말해줄 때 우리는 힘이 났고 용기가 생겼다. 불안정한 고용판 위에 있는 우리들은 재수가 없거나 운이 나빠서라기보다 이 시스템이 운용되고 유지되는 한 언제든 갈라지고 벌어진 틈 사이로 추락할 수 있다. 이런 부분을 말해주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지치지 않게 만들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싸움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 질긴 싸움에서 가장 큰 우링릐 정당성이 훼손되지 않았다. 그것이 보존되고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앞으로 한발 더 나가게 만들었다.”(55쪽)
실제로 지금까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쌍용차의 오너가 된 인도의 마힌드라 회장을 만나기 <희망 비행기>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모금을 통해 인도로 건너가 복직 요구를 직접하고자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쌍용차 사태는 회사의 재정 건정성과 아무 상관이 없었던 기획도산이라는 사실이 법적으로 밝혀졌고 이는 파업에서 해고에 이르는 순간까지 쌍용차 노동자들이 끝까지 주장했던 사실이었다. 지배적 미디어나 세간의 냉소들이 ‘귀족노조’를 부정하고 멸시하는 것으로 나아가며 갖은 수모를 겪었지만, 포기할 수 없는 객관적 근거를 이들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22명의 죽음은 투쟁의 기간이 지속되면서 저지하기 어려운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입은 트라우마는 여전히 완치되지 않고 치유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해고자는 많이 걷는다. 걸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이 길이 맞는지 묻고 또 묻는다. (…) 걷는 것에 충분히 집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걷는 이들의 몫이 아닌가. 쌍용차 노동자들은 여전히 걷고 있다. 방향을 그리기엔 걷는 것 자체가 너무 버겁다. 우선 우리는 최선을 다해 걷고 또 걸을 것이다. 이제 해결의 방법은 함께 찾아보자. 걷는 우리가 모든 걸 떠맡을 순 없지 않는가. 쌍용차 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생각’하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65쪽)
투쟁의 방식이 다만 분노와 증오로부터 되지 않고 사랑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즐겁게 투쟁하고 기쁘게 사랑하는 것. 몸을 가볍게 하는 것, 힘을 빼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이것이다. 살아남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그렇게 살아갈 때만이 인간의 존재는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풍부화된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죽음이 내게 준 지침이다.” (83쪽) 동료의 죽음으로 향냄새가 익숙해지고 술에 항상 취해 있었음에도, 노동자들은 사랑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누군가의 죽음이 좌절과 허무로 이끌지 않고 더 많은 사랑과 기쁨으로 나아가도록 만든 지평이라고 알려준다.
3. 이른 바 노동자들의 글쓰기가 특별한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창근의 글쓰기는 파업과 해고투쟁이라는 노동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노동’의 현실을 포착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 그것이 ‘노동’이라는 기왕의 규범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실감’으로 드러내고 있어, 이전의 노동자 에세이와는 다른 지점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노동 활동 영역 내에서의 글쓰기보다 노동자들이 파업과 해고를 통해 ‘스스로가 노동자 됨’을 인지하는 과정이 훨씬 증대되고 있다면, 노동자 글쓰기의 미래는 파업과 해고투쟁의 과정에서 산출될 것이라는 묘한 생각을 갖게 만든다. 심지어 노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노동자로 보이지 않게끔 하고자 하는 태도가 없지 않다면, 파업과 해고투쟁의 순간에 노동자로서 세계에 대해 재성찰하는 표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파업과 해고투쟁은 언제나 노동자를 길러내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속시키는 권리를 발명하게 하는 학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이 파업에서 해고로 이어지면서, 학교의 범위는 공장에서 공장 바깥으로 점차 확대되었고 지역사회와 한국사회 전체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만 봐도 얼마나 영민하고 기민한 학교가 만들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공동체적 결속과 유대, 사랑과 우정의 가능성이 저 학교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핵심 과목이다. 물론 그 사이에 좌절이나 사회의 전반적인 냉대와 동료들 내부의 균열들을 모두 감내하는 과정들이 고통으로 엄습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우정과 사랑에 대한 호소는 늘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먼저 가닿는 법이지 않던가. 우리가 늘 손을 건네는 것은 강자나 부자가 아니라 빈자들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빈자들이 손과 고개, 마음을 서로 건네고 동료가 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이유 역시 무수히 많을 것이다. 무수한 그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손을 잡지 않은 사람들은 강자가 되거나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빈자’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더 많은 빈자들이 학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책에 나와 있듯이 희망버스와 같은 기획일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이 마음의 끈을 이을 수 있도록 하는 촛불집회와 같은 방식이나 열린 추모제의 형식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발명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발명해야 하는 것도 빈자들의 몫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래서 모든 빈자들의 삶은 쌍용자동차 사태와 연관되어 있고 한국의 곳곳에서 발생하는 갖은 투쟁은 빈자들의 공통 몸싸움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사실 아무도 그 몸싸움의 장소에서 퇴근한 사람은 없는지 모른다.
4. 한국사회의 다양한 사업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파업과 해고의 칼바람은 앞으로도 훨씬 가속화할 예정이다. 징계해고, 통상해고, 정리해고에 일반해고까지 가능하게 된 현재의 노동 조건은 사회 전체를 파업과 해고투쟁의 학교로 전환하도록 요구하는 것인지 모른다. 부문별 투쟁에 한정되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이어질 노동에 대한 멸시와 무시, 권리 박탈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노동이라고 여기지 않은 장으로까지 확장되도록 요청하고 있는 형편이다. 가령, 문화와 예술의 장에서 일어나는 갖은 권리 침해나 박탈 그에 따라 이루어지는 침묵이나 은폐, 해고의 경우도 이의 연장선상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아직은 문화인과 예술인들의 문제제기나 관련 직업군의 일부분에서만 자신들의 행위를 노동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창조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행위와 결과를 노동과 노동의 결과로 결코 볼 수 없다고 여기는 탓이다. 이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전개되어야 하겠지만, 문화, 예술이 제작되는 과정과 이를 둘러싼 갖은 행위들에서 제대로 발화되지 않은 노동의 영역들이 잠복해 있다면, 이를 하나씩 검토하는 일이 문화예술인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전개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퇴근은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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