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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구하는 목소리가 먼저 돕는다

『출판, 노동, 목소리』(고아영 외 10인, 숨쉬는책공장, 2015)

김 대 성(<로컬데모>)

 

1. 허락 받지 않은 자리

언제나 그렇듯 책을 펼쳐 활자를 읽기 전에 날렵하고 매끄러운 책의 표면을 어루만져본다.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매만지는 감촉을 좋아했던 것은 책 그 자체를 내부 깊숙하게 감추어져 있는 비밀스러운 활자의 육체라고 여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그 탐닉이 더 강해졌다고 할 수 있으니 크게 틀린 짐작은 아닐 듯하다. 무표정하고 딱딱하면서도 한없이 관능적인 이 이중성이야말로 ‘책’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그 매력에 대한 탐닉이 책에 대한 페티쉬(fetishism)를 강화하고 때론 책을 신성화하기도 한다. 『출판, 노동, 목소리』(고아영 외 10인, 숨쉬는책공장, 2015) 또한 습관처럼 매만지다가 책에 대한 탐닉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를 억누르는 데 동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핏 디자인이 최소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밋밋한 책의 표지를 쓰다듬기만 했는데도 말이다.

이 책은 펼치기 전부터 이미 이야기를 시작 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책을 탐닉해온 오래된 습관 중의 하나인 표지를 어루만지는 행위를 향해 있었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의 표지엔 내부에 있어야 할 것이 바깥으로 나와 있고 굳이 기입하지 않아도 될 정보가 주인의 이름처럼 새겨져 있다. 대개는 책의 맨 뒷장에 정보 차원으로 기입되어 있는 발행인과 펴낸이, 펴낸곳, 동록번호 ISBN 등이 표지 ‘디자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요즘엔 웬만한 책엔 ‘삭제’되어 있는 디자인, 영업, 편집자의 이름뿐만 아니라 종이와 인쇄․재본에 관한 정보까지 표지 디자인에 동참하고 있다. 책의 맨 뒷자리에 있어야 할 이름이 책의 맨 앞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 조금은 어색한 그 자리바꿈이 책을 탐닉하던 내 손을 멈칫거리게 했다. 멈칫거림의 이유. 그건 책에 대한 관념과 태도만이 아니라 ‘책’이라는 간명한 이름 속에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기입되어 있는지, 아니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책’이라는 이름을 들어올리고 있었는지를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음을 인지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감춰야 하는 것이 드러나 있을 때 쉽게 공격 받는다. 그런데 ‘권리’ 또한 그렇게 허락 받지 않은 자리에 나왔을 때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말해왔던 ‘권리’가 실은 누군가에게 허락 받거나 승인 받은 뒤에만 이야기 되어 온 것은 아닐까. 허락 받지 않은 자리에서 권리를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인지 뒤늦게 체감하고 있는 시절. 감춰져 있어야 할 이름들이 바깥에 나와 있는 『출판, 노동, 목소리』의 표지 앞에서 자꾸만 멈칫거리게 되었던 이유가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2. 전류를 흐르게 하는 운동

11인의 출판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출판, 노동, 목소리』를 함께 읽는 이 자리를 준비하며 책의 표제이기도 한 ‘목소리’를 ‘수신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출판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이 책을 어떻게 수신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데모:북>의 작업이 어떤 목소리를 수신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나를 이끌기도 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귀를 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듣기란 건네는 이야기를 넘겨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야 한다. 그것은 들어(listen) 올리는(lift up) 일이다. ‘들어-올리기’를 통해 다른 곳으로 이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는 것, 그것이 수신(受信)의 숨은 뜻이라 생각한다. 목소리의 자리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수신할 수 없다. ‘갑’과 ‘을’의 자리를 일시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를 내어주는 일’을 통해서만 ‘목소리의 수신’이 가능하다. ‘자리 내어주기’는 몫을 재분배함으로써 박탈되었던 권리를 찾는 일이며 ‘목소리의 사각지대(死角地帶)’를 수신이 가능한 영토로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목소리에 자리를 내어주는 일, 목소리를 수신하는 일, 다시 말해 목소리를 들어-올릴 때 그것은 진동 한다. 다른 곳에 영향을 주는 파장이 되고 전류가 된다. 목소리를 전류로 흐르게 하는 일이 바로 수신 하는 일이다. 잠깐 전신주가 되어 그 목소리-전류를 흐르게 하여 다른 장소로 전하는 일. 그렇게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진동할 수 있게 이어주는 일은 <로컬데모>가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출판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수신하는 것이란 책과 관련된 수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들리지 않던 목소리)을 수행해온 이들이 교류할 수 있는 전선(電線)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중심에 놓아두거나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목소리가 흐를 수 있는 경로를 구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축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바닥 공사부터 시작해야 하는 지난한 건축적 과정과는 다르다.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거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동력을 생성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소리를 수신하는 것’만으로도 각자의 고유한 전류를 흐를 수 있게 한다. ‘수신하는 것’은 ‘자리를 내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것은 각자의 목소리가 흐를 수 있도록, 그 흐름을 지속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일이다. 목소리가 다른 곳에 닿을 때, 다른 것과 만날 때 그것은 전류가 된다. 동작을 멈추었던 장치가 가동하고 꺼졌던 등불이 다시 불을 밝힌다. 목소리를 수신하는 일이 발전기를 돌리는 운동과 다르지 않음을 새삼 새기게 된다.  

 

3. 빈곤한 목소리들의 교차

이 책을 읽으며 얼마간의 <로컬데모> 활동을 돌이켜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수사(修辭)’들을 빈번하게 만나게 된다. 모른 척 해야 할 것이 아니고 서둘러 버려야할 것도 아니지만 돌부리처럼 자꾸만 그 앞에서 멈춰 서게 되는 장애물과 같은 수사들. 그건 글로 많은 걸 표현해왔던 그간의 이력 속에 감춰져 있던 어떤 빈곤 혹은 편향됨과 마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역문화예술인들의 권리 수호를 위한 협의체. <로컬데모>라는 이름 앞에 내세워두었던 그 말과 자주 마주하게 된다. 문화예술인들의 ‘권리’란 무엇인가? 그 실체를 구체화할 수 있어야 협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야 협의(協議)가 허울뿐인 협의(狹義)가 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침해당하고 있는 권리를 지키고, 빼앗겼던 권리를 되찾는 일을 함께 하자고 요청할 때의 건넬 수 있는 말의 목록이 빈곤하다는 것을 매번 느낀다. 다급할수록 수사에 기대고 있음을 환하게 알게 된다. 그런 상태를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런 상태에서 시작해야 하고 요청해야 하고 타전해야 한다.

그래서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만 같다. 자주 무기력해지고 응답 없음을 원망하게 된다.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침탈당하고 있지만 결국 개인의 문제이거나 불행하고 안 된 일로만 여겨지고 있는 막연한 일들을 명징한 사태로 마주하자는 그 말건넴의 빈곤함이 가리키는 것은 말(수사)의 문제일까? 말의 전해지지 않음 속에서 나는 이곳의 감춰진 빈곤함을 생각하게 된다. 당사자가 아니면 말할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상태, 관계의 빈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누구와 함께 그 일을 해야 할지, 어디에 이런 사태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야할지 알 수 없는 환경의 빈곤. 오랜 시간동안 이러한 빈곤을 당연한 것이라 내면화해온 상태의 빈곤, 달리 말해 생태의 빈곤.

내 언어의 빈곤함과 반복적으로 마주하다보니 또 다른 빈곤과 만나게 된다. 나의 빈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처럼 또 다른 빈곤 또한 모른 척 할 수 없다. 빈곤한 그 상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빈곤한 말을 포기하지 않고 밑천으로 내어놓는 것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출판, 노동, 목소리』에서 내가 들었던 것처럼 목소리를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기꺼이 ‘고백’이라는 날 것의 목소리를 발신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목소리 하나를 여기에 옮겨둔다.  

“그러니까, 나는 고백하고 싶었다. 자판기 뒤에 사람이 있고, 책 뒤에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고.”

―정유민, 「자판기 뒤에 사람 있어요」, 132쪽. 

 

여기서 말하는 ‘고백’이란 솔직한 심정을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편집자적 자의식’을 내려놓은 ‘자기 목소리’를 가리키는 것에 가깝다. ‘책’이라는 ‘숭고한 대상’을 만드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감추고 지움으로써만 책을 더욱 신비롭고 가치 있게 만드는 이가 아닌 바로 그 책을 만들고 있는 ‘노동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뜻이리라. 정치적으로 올바른 ‘책이라는 상품’을 만들어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는 그 행위 자체가 가치 있음을, 그것이 ‘노동’이라는 낮은 자리의 말임을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올바름이라는 가치는 ‘책’에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만드는 일련의 공정, 다시 말해 책을 둘러싸고 있는 ‘생태’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빈곤하고 미약한 목소리들이 책의 생태를 지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책 만드는 사람의 자의식에 빠져 눈을 질끈 감고 그것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애써 외면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건 마냥 사치스러운 일”(130쪽)이었음을 고백하는 일은 자신이 책 뒤에 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목소리를 발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출판노동자들이 ‘편집자적 자의식’을 내려놓고 그동안 방치했던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접하며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집자적 자의식을 내려놓았다는 것은 책이라는 숭고한 대상을 만드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가치 있는 노동으로 책이라는 공유재를 만드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재명명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각자의 직무적 사명감을 서둘러 내려놓는 것이 능사는 아닐 테지만 그 사명감이라는 게 근본적인 무언가를 가리고 있었다면 뒤늦게라도 마주하고 또 응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문해본다. 내게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란 무엇일까. 그건 ‘응답의 의무’ 같은 게 아니었을까. 혹은 ‘응답으로서의 말하기’에 맹목적이었던 것이 아닐까. 모든 요청에 대해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의식이 얼핏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과잉을 낳은 것은 아닌지 홀로 되묻게 되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무기력’의 정체 또한 어쩌면 나조차 모르는 사이에 과잉되어버린 자의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란 바꿔 말하면 ‘원고를 청탁 받는 사람’일텐데 그건 결국 어떤 조직과 체제로부터의 호출에 응답하는 일이다. 그러니 글을 쓰는 사람의 ‘무기력’은 ‘응답(능력)의 빈곤’으로부터 연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디로부터도 호명되지 않는 조건이나 누군가로부터의 호명을 기다려야만 응답할 수 있는 수동성에 있기도 할 것이다. 거듭 자문하게 된다. 그간 애써 써왔던 글들이 어디로부터, 누구로부터의 응답이었는가.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 때문에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또 무엇을 묵살했고 무엇을 외면했던 것일가. <로컬데모>라는 ‘지는 싸움’을 하며 글쓰기를 통해 행했던 그간의 싸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응답과 묵살, 회피와 소문, 비아냥과 힐난이 번성하는 지역이라는 현장에서 더욱 명징해지는 것은 ‘패배의 감각’이다. 그런데 묵살이 명징해질수록, 소문이 번성할수록, 비아냥과 힐난이 거셀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싸워야할 대상이 추상화된 개념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구체적이고 명징한 실체라는 것. 그보다 더 힘써야 할 것이 <로컬데모>가 만나 할 이들이라는 것. 곳곳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하고 있는 구조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의 장소를, 오늘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무릅쓰고 말해본다면 패배가 재산이 되고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패배가 작은 매듭이 되고 또 매개가 될 수 있다면, ‘글 쓰는 사람의 자의식’을 서둘러 철회할 것이 아니라 ‘응답의 의무’의 자리에 ‘지는 싸움을 거듭 행하는 것’이라는 패배의 이력을 덧대어 새겨두고 싶다.

출판노동자(들)의 말을 이어 받아 계속 이야기해보자. 그들(만)의 말이 아니라 이곳으로 도착하고 있는 말이며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는 말로 전유하며 인용해둔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출판이란 무엇인지 늬들이 알랑가 모르겠지만 내 말을 잘 들어’ 화법에 익숙한 세대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곁에 있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131쪽) 이 낮은 목소리를 따라 다른 목소리가 흘러든다. “우리는 서로를 확인했다.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우리들’의 존재를.”(132쪽) 

 

4.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

『출판, 노동, 목소리』를 읽으면서 잊고 있던 한 권의 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프로파간다에서 펴내고 있는 ≪GRAPHIC≫ #28 BOOK DESIGN ISSUE VOL.2(2014). 책 디자이너들의 인터뷰와 디자인 화보가 실려 있는 이 독립잡지를 작년 이맘때쯤 독립출판디자인그룹 ‘그린그림’의 박성진 씨로부터 선물 받았었다. 『출판, 노동, 목소리』와 달리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북디자이너들의 글엔 ‘노동’에 관한 내용은 전무하다. 그 이유를 각자가 놓여 있는 위치(처지)의 다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그건 분명 ‘부재’ 하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기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맵시 있고 매끄러운 책의 디자인에 관한 곳에 ‘노동’이 들어가는 게 어색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출판, 노동, 목소리』엔 자신의 작업물에 대한 가치와 성취, 그리고 미학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 또한 부재의 자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 두 권의 책에서 내고 있는 목소리는 서로를 향해 부재의 자리를 가리키는 좌표로 삼을 수 있다. ≪GRAPHIC≫에 부재하는 ‘노동’과 『출판, 노동, 목소리』에 부재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서로의 목소리를 겹치게 할 때 그 부재의 자리가 분명해진다.

부재의 원인은 ‘결락’이나 ‘부족함’이 아니라 어떤 목소리의 진입을 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트’의 존재다. 『출판, 노동, 목소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디테일하고 미적인 부분에 관한 목소리까지 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나는 이 두 책이 서로를 교차하며 드러내고 있는 ‘부재의 자리’가 바로 이곳의 출판 생태를 가리키는 표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교차하는 일, 매개하는 일의 가장 중요한 점이 ‘체력’임을 알게 된다. 「체력론: 글, 체력, 출판에 대한 소고」(김신식)에서 내가 읽게 되는 것은 한 편집자의 사적인 회고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편집자가 될 수 있어야 함에 대한 역설이다. 필자의 원고에 대해 의견을 요청하는 것처럼 시스템의 개고(改稿)를 부단히 요청할 수 있는 체력이 있어야 한다. 필자의 글을 빌려 의견을 전하는 ‘2차 진술자’처럼 감춰진 문제를 드러내고 억압되었던 목소리가 뻗어나갈 수 있게 매개하고 교차할 수 있어야 한다. 매개와 교차는 기술이 아니라 노동이다. 무기력해지지 않는 체력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러니 ‘부재하다’는 빈곤의 표지는 매번 어떤 깃발을 흔들며 이곳으로 보내는 신호다. 그 부재의 신호를 누가 발견하고 또 누가 응답할 수 있는가. 지금 목소리를 발신하고 있는 사람, 누군가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먼저 들을 수 있다.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가 결국 누군가를 먼저 돕는다.

 

 

<데모:북> 2회_문화매개공간 <쌈>_2015.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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