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인 자들의 잠재성

<데모:> 1(이창근, 이창근의 해고일기, 오월의 봄, 2015) 후기

김 대 성(로컬데모)

 


 

우리 모두는 싸움과 투쟁이 일상화 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모든 싸움과 투쟁은 규모와 대의를 통해 규정되곤 하지만 싸우고 있는 이들은 알고 있다. 규모와 대의보다 더 힘이 센 것이 있다는 것을. ‘현장말이다. 모든 싸움과 투쟁은 현장()이 증명한다. 그런 이유로 싸움과 투쟁을 하는 이유는 이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빼앗긴 현장을 탈환하고 지키는 것이 오늘날 모든 싸움과 투쟁의 첫 번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로컬데모> 또한 현장을 다시 찾아 지켜내고자 한다. 우리 주변의 싸움과 투쟁, 대의나 규모에 포착되지 않는 다양한 움직임들을 주목하고 불러내어 각자가 놓여 있는 현장()을 공유하는 자리가 필요하다. 개별화되고 차단되어 있는 각자의 현장을 만나고 감응하는 일부터가 어쩌면 싸움이고 투쟁인지도 모른다 

이창근의 해고일기(오월의 봄, 2015)를 읽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싸움과 투쟁의 현장에서 을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다급하고 절박한 현장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글을 쓰는 일. 그것은 무력감과 절망의 증표가 아니다. 싸움과 투쟁의 현장에서 쓴다는 것아직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창근에게 글은 대개 구조 요청의 의미로 씌어진다. 이 구조 요청은 위기 상황에 놓여 있는 이가 바깥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쓰는 구조 요청은 이곳이 위기 상황임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창근의 해고일기가 비슷한 말을 오랜 시간동안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은 지금-여기-우리의 위기를 지루한 반복쯤으로 여기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냉소와 환멸. 그것은 대체로 위기가 아닌 구조 요청을 향하기 마련이다. 그러는 편이 더 쉽고 간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말해야 한다. 반복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가 반복하고 있다고 심드렁하게 말해버리는 우리라는 것을 

냉소와 환멸의 반복을 뚫어내며 이창근은 말한다.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지역과 내 삶에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야”(112) 한다고. ‘토대를 바꾸고 기반공사를 다시 하는 일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 목소리를 구조 요청의 반복 속에서 길어올린 사유라고 해도 좋다. 싸움과 투쟁의 현장이 노동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다. 노동자에게 글을 쓰는 일이란 하지 않던 일을 갑작스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기어코 알아내어 하는 일이다. 투쟁과 싸움 또한 그런 일일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의 사실을 배우게 된다. 투쟁과 싸움 또한 그런 일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일을 기어코 알아내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공부와 투쟁을 병행하는 노동자’, 그런 노동자가 기어코 말한다. “투쟁하는 노동자는 자본의 치부와 비밀을 가장 많이 아는 학자이며, 니체의 말처럼 철학은 망치로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철학자다.”(114)

  노동자는 위기의 시대, 더 정확하게 말해 구조 조정의 시대를 살아가는 잠재적인 학자이자 철학자다. 시스템이 허용하지 않은 싸움과 투쟁을 할 때 그 잠재성이 드러난다. 힘겹게 증명된 이 진실 앞에서 질문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 예술가의 잠재성이란 무엇인가? 오늘, 시민의 잠재성이란 무엇인가? 잠재성이라는 공통성을 탐색하기 위해 다시 고쳐 물어야 한다. 지금-여기-우리의 싸움과 투쟁은 어떤 모습인가? 구조 조정의 시대에 저항하는 싸움과 투쟁의 현장 속에 각자의 잠재성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의 공통 싸움과 투쟁은 각자의 잠재성을 만나게 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창근은 20096월 공장 점거 투쟁 중 누군가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자동차를 만들어보면 어떨까?”(119) 파업 공장 안에서 노동자가 자동차를 만드는 일을 이창근은 꿈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저 너머에 있는 요원한 일이 아니라 코앞에 있는 잠재성이기도 하다. 기타를 만들던 해고 노동자들이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으로 활동하는 사례를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이 결성한 밴드 콜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페이지의 한 귀퉁이에 나는 이런 메모를 남겨두었다. ‘지역문화예술인들의 권리 수호를 위한 협의체 구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로컬데모>는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의 잠재성을 깨우고 실현할 것인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글로써 기록하면서 더 단단해지고 강해진다. 그 힘이 이곳을 조금 더 넓은 곳으로 만든다. 넓다는 것이 규모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하는 일, 보이지 않던 길을 내는 일을 통해서만 없던 영토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누가 그 일을 하고 있는가. 이창근은 해고자의 나이테에서 그 흔적을 찾는다. “생장 조건과 변화를 나무 스스로 기록하는 나이테는 기후조건이나 환경 변화, 특정한 사건의 압축 기록물이자 블랙박스이다.”(214) 해고자의 나이테엔 오욕의 역사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둥글 어깨 겯고 걸어가는 동심원의 나이테”(215)에 씌어져 있는 기록을 읽어야 하는 이는 우리다. 오늘의 우리는 (해고) 노동자들의 언어를 빌려 쓰고 있다. 억압 받고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 기대어 침몰한 세계에서 겨우 균형을 잡고 있다. 그러니 그 힘에 기대어만 있을 것이 아니라 그 힘을 밑천으로 기울어진 이 세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힘의 잠재성, 연대의 힘으로 말이다.

  끝없이 침몰하는 세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순 구분법은 무용해진지 오래다. 살아남은 우리는 잠정적 피해자인가, 아직 순번이 돌아오지 않은 피해 대기자인가? 피해자와 다행인 자가 있다. 우리는 아직 다행인 자다. 다행인 자의 유일한 동료는 피해자다. 마찬가지로 피해자의 유일한 동료 또한 다행인 자이다. ‘-관계라는 도식에서 민주주의는 요원해보인다. ‘은 점점 더 막강해지고 그만큼 염치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갑을 향해 잘못에 대한 인정과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갑이 바뀌지 않는다면 을이 바뀌어야 한다. 을들의 변화를 통해 -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파쇄해야 한다. ‘을들의 민주주의를 발명해야 한다. ‘-을 사이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을들 사이의 민주주의도 필요하다. ‘을들 사이의 민주주의란 연대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연대란 엇갈림과 뒤엉킴, 무수한 갈등의 긴장을 벼텨내는 끈을 아귀힘으로 붙들고 있을 때만 지킬 수 있다. “노동자 사이를 갈라놓은 건 자본이지만 그 틈을 메우고 살아가는 건 우리들의 의지다.”(368)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만남을 주저하지 않는 것, 앞질러 절망하거나 피로해지지 않는 것, ‘을들의 민주주의는 그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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