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아(부산대 비정규 교수)


1.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루하루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좀처럼 표현되지 않고, 표현되어도 전달되지 않고, 전달되어도 응답되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든 타인의 이야기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우리는 아직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 모든 싸움들이 더 오래 지속되고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유, 전부는 아니더라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싸우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뇌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기껏해야 ‘그들’이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느낄 뿐 그 속내를 이해할 방법은 없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고립이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확인하는 체험이며 그런 체험이 반복될 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오래 싸운 사람들이 고집불통으로 보이고 실제로 그런 면모를 지니게 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고립된 한 사람이 기댈 곳이 자기가 옳다고 여겨온 신념밖에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더욱더 고립될 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거기에 지지 않겠다는 의지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욕망이 남아있을 때, 사람들은 펜을 들고 곁에 없으나 어딘가에는 있을 동료를 향해 말을 건넨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309동 1201호 지음, 은행나무, 2015)를 그렇게 건네진 말들로 읽는다.   

2. 이 말들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학이라는 곳이 익숙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데, 그 일차적인 이유는 아마도 대학을 일터라고 여기지 않거나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여기는 데에, 그리고 특히나 연구하고 강의하는 사람들을 노동자로 보지 않는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대학원에서 생활하고 시간강사 일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책에서 그려진 상황에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다니는 곳보다 낫다’거나, ‘나는 운이 좋았던 건가 이런 상황은 말도 안 된다’라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 이 기록을 읽은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대학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그의 삶의 기록에서 보이는 고통스러움과 소소한 기쁨들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것과 그의 것을 비교하고 대조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들을 감지하면서도 눈 돌리기 힘든 이 말들의 힘은 역시나 자기가 겪은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에서 나오는 것. 그 기록 속에서 ‘연구하는 자’로서의 정체성과 ‘노동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이 분열되고 겹쳐지고 경합하는 ‘시간강사’의 독특한 경험의 자리를 확인한다. 그리고 대학이 이미 기업이 되어버린 상황 속에서도 시간강사의 삶을 결정하는 ‘노동’의 자리, 대학에서의 노동의 조건에 대해 꺼내어 놓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 시간강사들의 욕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그의 말에 답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그와 유사하거나 다른 경험들을 나열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그의 경험이 잘 보여주는 대학에서의 노동의 자리를 살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의 기록에 응답하는, 그가 바랐듯이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과 대학원에 적용될” 것인 이야기를 공론화하는 더 좋은 방식일 것이다.

그의 기록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맥도널드의 노동조건과 대학의 노동조건을 비교한 부분은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대학 밖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많은 공감을 얻었는데, 이 부분은 단순히 대학보다 맥도널드에서 일하는 게 더 낫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서로 다른 두 일터에서의 노동 경험을 기록하면서 시간강사의 노동 현장이 어떠한지를 드러냄으로써, 그 기록을 읽어가는 우리는 평소에 보고 싶어 하지 않던 대학의 착취 구조란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접근해 들어가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는 그의 요구, 쓰라린 그 고독의 시간이 담겨 있는 글 곳곳에, 이곳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 같이 보고 이야기를 좀 해보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그가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자신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대학을 보고 기록한 부분, 그곳에서의 일그러진 일상들을 기록한 부분이야말로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더욱 필요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3.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몇몇 부분을 발췌하여 이곳에 옮긴다. 

“2008년 봄, 석사 1기 시절, 나는 학과 사무실의 대학원생 막내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의무적으로 학과 사무실이나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그런데 학부생 조교들 역시 공강 시간을 제외하고는 사무실에 몸이 매여 있었다. 학부생 조교들은 평균 15~20학점을 들으며 일주일에 20시간 이상 근무했다. 그러면 한 학기가 16주인데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에는 근무가 없어 대략 13주, 도합 260시간 넘게 일하고 80만원을 받아 가게 된다. 지금도 이러한 시스템이니 최저 시급에는 한참 못 미치는 액수다. 나는 조교 실장에게 조심스레 학부생 조교들이 일하는 시간을 모두 합해보면 최저 시급도 못 받는 것 같네요, 했다. 그는 알아, 그런데 우리는 뭐 받고 일하냐,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당연히 또 그렇게 하는 거지, 하고 답했다. 그의 말을 요약해보면 대학원생도 같은 처지이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그러니까 당연하다, 라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구조의 밑바닥에 있는 ‘개인’이었고, 조직의 관행과 싸울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서 그저 아 그렇네요, 하고 마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쩔 수 없지, 하는 조교실장 역시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우리 학과는 형편이 나았다. 계절학기까지 알뜰하게 출근시키는 학과도 적지 않다고 해서, 나는 욕이 튀어나왔다.”(111쪽) 

 

“대학원 과정을 모두 수료하고 시간강사가 된 지금도,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기에도 빠듯하다. 생업인 강의와 연구가 생계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까닭이다. 강의실에서는 허울 좋은 교수님이지만, 4대 보험조차 보장되지 않는 4개월짜리 비정규직 노동자다.”(12쪽) 

 

“‘대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다. 대학원생에서 시간강사로 이어지는 착취의 구조는 이미 공고한 시스템으로 자리잡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을 가속화해온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다. 그런데 대학은 스스로에게 숭고함과 신성함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동시에 그 어느 집단보다도 기민하게 자본의 논리에 영합해왔다. 흔히 대학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하고 미루어 짐작하지만 대학은 그 어느 기업보다도 노동권의 치외법권 지대에 있다. 학부생과 대학원생 조교가 받는 거의 모든 보수는 학비 감면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조교 장학금은 등록금 인상 폭에 관계없이 10년 째 그대로다. 교직원과 함께 일하거나 교직원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지만, 최저 시급, 주휴 수당, 초과 수당, 4대 보험 등 노동자로서 받아야 할 기본적인 안전망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대학은 학생의 노동력으로 행정 공백을 채우고, 그들이 내야 할 수업료를 일부 감면해주는 방식으로 인건비 지출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동네 편의점도 노동부의 눈치를 보며 최저시급과 주휴 수당을 챙겨주는 형편임을 감안하면, 어떤 면에서 대학은 거리의 편의점만도 못하다.”(13쪽) 

 

“아마도 내가, 혹은 내 또래의 대학원생이나 시간강사들이 겪는 외로움의 근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반(半)사회적인 인간이다. 학생도 아니고 사회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듯한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반(反)사회적 인간이다. 다른 노동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 표면적으로 노동하고, 사회가 원하는 소득과 소비 기준, 그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한다. 일주일에 네 시간 노동(강의)하고 월급을 받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비난한다. 강의 준비, 과제 첨삭, 개인 면담과 같이 드러나지 않는 노동의 시간이 오히려 더 길지만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사회성의 결여, 사회에서 함께 동시하고 있으나 동시하지 않다고 느끼는 동시성의 비동시성, 이러한 외로움은 연애나 우정이나 가족애 같은 것으로는 극복되지 않는다. ‘사회적’이지 못한 존재는, 외롭다.”(66쪽) 

 

“누군가는 내게 ‘교수’가 되기 위해 ‘지방시’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 아닌가 묻는다. 그러니 본인이 그러한 삶을 선택했다고도 말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운 좋게 교수가 되면 모든 삶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잠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나의 하루하루를 갉아먹었고, 나의 현재를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격하해버렸다. 간신히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오로지 교수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강의실에서든 연구실에서든 노동자로 존재하기 위해 모두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236-237쪽) 

 

“지방시 이전과 이후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이 사회의 무수한 지방시 중 하나일 뿐이다.”(237쪽)

 

4. 페이스북에 이 책의 저자가 쓴 특별기고 <나는 시간강사다: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둡니다>(http://slownews.kr/49121)를 공유해놓았더니 한 선생님께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남기셨다. “시간강사를 그만두는 데도 인터뷰를 하는 경우가 다 있구나, 허. 우리들 대다수는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는데 시간강사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들었다. 불쌍한 사람은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나는 그 글을 읽고 한편으로 공감하면서도 “그러나 그가 과연 그만둔 것일까? 그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가 결정한 이 일이 쫓겨난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겪게 될 일”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주고받은 말에서, 다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곳의 대학에서 연구하고 강의하는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두려움과 우리가 직면한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살아남은 자와 쫓겨난 자. 쫓겨난 자와 떠나간 자. 대학구조‘개혁’이 진행 중인 지금 이곳의 대학에서 많은 시간강사들은 한편으로는 남아 있고 싶다는 욕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나가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하루하루 흔들린다. 그리고 좀처럼 방향을 틀 것 같지 않은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 속에서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대학’이란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느 순간 ‘대학’이란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가가 ‘능력’으로 여겨진다는 사실도 말해야 한다. 언젠가 ‘여기 아니면 내가 갈 데가 없는 줄 아나?’ 또는 ‘나는 뭐 여기서 일자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와 같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묘한 박탈감을 느꼈다. 그 말을 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그때는 가늠하지 못했다.

“이곳을 떠나고 싶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어서” 이 두 문장은 “‘난민’이 된 한국 청년”(강정석, <시사인> 429호)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기사에서 한 인터뷰이는 “내 일에서 보람을 느끼면서도 먹고살아갈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남자든 여자든 앞으로의 삶 정도는 계획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살면서 행복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느 하나도 충족되지 않는 나라에 왜 남아 있느냐를, 저는 오히려 묻고 싶어요.”라고 말하는데, 이 세 가지 요청이 그 자체로 어색하고 너무도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뿐일까? “‘대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다.”(지방시, 13쪽) 이 괴물에게서 빠져 나가면 또 다른가? 대학보다 더 넓고, 더 큰 똑같은 구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가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라고 사람들은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문제는 대학 안이냐 밖이냐가 아니다. 안에서 밖을 만들고, 그와 동시에 밖에서 안을 문제 삼음으로써 개입해 들어오는 과정이 필요하다. 대학이 괴물이라는 사실에 공감하면서도 안에서 싸우는 것이 답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답이다 라는 식으로 선을 긋고 서로 적대하기보다는, 안이든 밖이든 지금의 대학의 구조와 그곳에서의 삶의 방식을 문제 삼는 많은 말들을 만들어내는 일이 시급하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당연히 또 그렇게 하는”(지방시, 111쪽) 것을 그만두고 싶다는 것을 말하기. 그리고 그러한 종류의 ‘정치적인’ 말하기를 이어가면서 대학의 문제가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논의하기. 그런데 대학의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때 ‘탈조선’이 말해지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문제없는 곳이 어디 있는가”라는 의문과 무력감을 드러내는 반응들, “학교라는 곳, 이미 망가진 지 오래다. 새삼스레 우리가 왜 그곳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거기보다 급박한 문제에 직면한 곳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라는 질책들을 마주하는데, 그 반응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5.  지금 이곳에서 ‘학문’을, ‘예술’을 한다는 것,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곧 하게 될 몇 마디가 사람들에게 가장 이해받기 힘든 것임을 예감한다. 책을 읽는 중에는 “그래, 대학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시간강사들이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거나 잊고 싶어 하지”하며 공감하고 지난 시간들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면, 책을 덮으면서는 “아 또 한 사람의 연구자를 잃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이 책은 한 시간강사가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시간강사로 일하게 된 ‘나의’ 경험을 쓰고 있고, 그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의’ 연구와 생활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실상 연구란 개인의 것에 그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개인의 것이 아니다. ‘공공의 것’으로서의 ‘지식’이라는 생각을 놓치기 쉽다는 것도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다. 생각해보면, 역설적으로 ‘권력’으로서의 ‘지식’이라는 생각은 익숙한데, ‘개인’이 아니라 ‘인류’의 지식이라는 생각은 낯설다. ‘가난’도 여러 가지다. 나는 우리 사회가 한 명의 연구자를 잃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어떤 부분이 더 곤궁해진 것이라고 본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연구자가 맡고 있는 책임이라는 것은 공적인 앎, 인류의 앎에 기여하는 데 있는데, 이런 말은 현재의 대학 또는 사회의 상황을 보면 공허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6. 마이클 애플의 책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강희룡 외 옮김, 살림터, 2014)에 대한 장정일의 독서일기 <자유경제원이 왜 앞장섰을까>는 “국정화 논란에서 교육 자체를 고민해봐야 한다. 교육이 중립적이라는 것은 환상이다. 경제위기 때 정부와 보수 언론이 벌이는 교육 논쟁은 실업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고 기업이 원하는 ‘교육 설비의 재편’을 꾀하는 시도다.”라는 부제(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676)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던 대학도 이러한 시도 가운데 있으며, 소위 ‘대학구조개혁법’과 그것의 가장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타격을 받을 시간강사들의 노동조건을 변화시킬 ‘강사법’의 시행도 이러한 시도의 맥락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살펴야 한다. (이에 대한 다양하고 상세한 논의들은 <문화/과학> 82호 ‘신자유주의 대학’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http://cultural.jinbo.net/?p=1456 참고.) 

“신자유주의가 부상한 지난 30~40년 동안 교육이 정치적 정체성의 변화에서 주변부적인 것이 아니라 핵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회변혁의 장소로 그리고 사회변혁의 도구로 학교를 성공적으로 이용”한 것은 보수 우파였다. […] 거대한 사회·교육적 프로그램을 통해 보수 우파는 자유에 대한 대중의 상식을 차츰 바꾸어왔다. 즉 자유란 정치적인 개념이 아니라 규제받지 않는 시장 기능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납득시킴으로써 “‘사적’ 자본의 축적이야말로 공공선”이라는 것을 오늘의 사회 상식으로 만들어놓았다.” 

“교육이 신자유주의의 정리(定理)를 수용함으로써 학교는 학생들에게 개인은 성공할 수 있지만 모두는 성공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을 예습하는 훈련장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학교는 새로운 세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는 제도가 된다.”  

나는 지방시에서 반복되는 한 문장 “대학은 역행해야 한다”를, 지금 이 순간에도 행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무수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의 재편’의 흐름 속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다시 읽는다. 그리고 서경식의 『시의 힘』(서은혜 옮김, 현암사, 2015)에서 읽은 “지배층의 이야기(Master narrative)에 피지배자 측의 대항적인 이야기(Counter narrative)를 대치하는 것이 미래 인류의 ‘새로운 보편성’을 구축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한”(52쪽)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 사회의 무수한 지방시 중 하나일 뿐”(지방시, 237쪽) 그와 나의 자리, ‘고난’을 겪고 있는 무수한 ‘나’들의 자리에서 행해질 말들로 엮이게 될 ‘대항 이야기’가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로컬데모>에서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이야기들은 발화되고 대답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러한 대항 이야기들이 ‘새로운 보편성’을 가지고 고립된 채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으려면, 각각의 이야기들이 자신의 고난을 바로 바라봄으로써 타자의 고난도 상상할 수 있는 태도와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 그러한 말들을 주고받는 가운데 “‘자신의 고난’을 철저하게 응시하는 것이 ‘타자의 고난’을 향한 상상으로 열릴 수 있는가”(『시의 힘』, 216쪽)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2015. 12. 18_중앙동 또따또가 갤러리 <시간강사라는 주변 : 곁과 편>(데모북+연속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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